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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진실

[6.25관련 진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상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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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은 어느 경우에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으나...

한반도의 비극적 사건 가져온 근본 원인은 좌익·공산세력에게 있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공산주의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로,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말부터 9월경까지 수많은 연맹원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사망자 수는 제각각이다. 확인된 희생자만 5,000 명이고, 증언에 근거해서 최대 20만 명이라고 하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위키백과], 수만 명 ~ 20만 명이라는 두루뭉수리한 자료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이승만 정부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왜 발생하게 됐을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해방 정국 한반도 상황부터 살펴야 한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8년 건국에 이르기까지 남한 내에서 좌익의 책동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대구 10월 폭동’,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있다. 좌익 세력들은 남한 내 군경, 반공주의자, 기독교인 등을 비롯해 무고한 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이에 정부는 좌익 세력의 책동에 강경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좌익 책동에 대한 트라우마,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원인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 인민군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군경과 우익 인사 및 그들의 가족을 인민군에게 밀고하고 체포 및 살해에 협조하는 등 이적 행위를 저질렀다. 좌익 책동의 트라우마에 걸려 있던 한국 정부는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리를 명령했고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연맹원들이 학살됐다.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좌익 세력들은 남한 내에서 어떤 책동을 일으켰던 것일까?


1946년 10월에서 12월 중순 사이 대구에서 좌익·용공 분자들의 대규모 무장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이름하여 대구 10월 폭동.김용삼 기자가 공개한 당시 기록을 보면 좌익 세력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좌익 세력들은 경찰관의 사지 및 성기를 절단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2일 밤 미군순찰대가 달성공원에서 7구의 경찰관 시체를 발견했는데, 두 명은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으나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었고, 일부 경찰관은 거세를 당했다. 폭도들은 경찰의 얼굴과 신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여 살해했고, 손을 등 뒤로 묶고 피를 흘려 쓰러질 때까지 날카로운 돌을 던졌으며, 큰 돌을 머리에 짓이기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붉은 대학살’의 저자 송효순이 공개한 대구 폭동 세력들의 학살 수법은 잔인무도하다 못해 변태적이다. 부녀자들의 옷을 벗겨 찢어 죽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이를 찔러 죽였다.

<▲총살 ▲죽창과 도검으로 마구 찌르기 ▲집에 가두고 불을 질러 생화장하기 ▲곡괭이, 쇠망치, 낫, 몽둥이 등 농기구를 사용해 타살 또는 생매장 ▲양민을 학살하기 전이나 후에 새끼로 목을 옭아 자동차에 매단 후 거리로 끌고 다니기 ▲나무에 매달아 때려죽이기 ▲생사람의 몸에 큰 돌을 달아 물에 던져 수장(水葬) ▲부녀자들의 옷을 벗겨 사지를 찢거나 잘라 죽이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이를 총검과 죽창으로 마구 찌르기 ▲죽은 사람의 얼굴에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시체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기>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기록도 섬뜩하다. 좌익 폭도들은 임산부의 배를 갈랐고 여성을 집단 윤간한 뒤 젖가슴, 성기 등을 도려내 죽였다.

<1948년 4월 18일 북제주군 조천읍에서 빨치산들이 육순이 넘은 경찰관들의 부모를 목 졸라 죽인 후 사지를 절단했고, 임신 6개월이 된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형수를 때려죽였다. 4월 20일에는 임신한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였고, 이틀 후인 4월 22일에는 모슬포에서 경찰관의 아버지를 총살한 후 수족 절단,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생매장했다.5월 19일에는 제주읍 도두리에서 마을 부녀자 11명을 체포하여 눈오름이라는 삼림지대로 끌고 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빨치산 50여 명이 윤간한 다음 총검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자의 젖가슴과 배, 음부, 볼기 등을 찔러 숨이 넘어가기 전에 생매장을 했다.>

남로당 소속 좌익 세력들에 의해 일어난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도내 400여 마을 중 259개 부락이 전소되고 1만 2,250호의 가옥이 불탔으며, 12개 면사무소 중 5개, 12개 경찰관서, 학교 34개소, 우체국 1개소가 소실됐다. 섬 인구의 10퍼센트에 이르는 3만여 명 이상이 희생되고 이재민 10만여 명이 발생하게 된다.

1948년 10월 19일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한다.국군 제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해 있던 중 부대 내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수·순천 일대를 장악한다.이들은 먼저 여수를 장악한 뒤 순천으로 이동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반란군들은 대중을 선동해 폭동을 부추겼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좌익분자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민가를 돌아다니며 약탈, 파괴, 방화 행위를 벌였다. 당시 순천에서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양민이 1,134명, 행방불명자가 818명이었다고 한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당시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남한 내 좌익·용공 세력의 책동을 막아내게 된다.



전쟁에서 일어난 비극적 현상들


분명한 것은 전쟁이란 이렇게 비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행위가 알게 모르게 집단적으로 때로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게 전쟁이다. 이기기 위해 인간은 단순한 소모품이 되는게 전쟁이다.

인민군은 남한 점령지에서 청소년들을 인민의용군이란 이름으로 강제 징발하여 전력을 보충했고, 후퇴하지 못하도록 발목에 쇠사슬을 매어놓기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역자들도 마찬가지다. 6·25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던 북한군 10만 명을 위한 보급품 운송에 동원된 남한 주민들은 한 사람 당 보급품 20kg씩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 20km를 걸어서 최전선으로 날랐다고 한다.(이런 군 보급품 운송 부역자들은 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황이 역전되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청소년들이나 군 보급품을 날랐던 부역자들은 다시 보복의 대상이 되는게 전쟁이다. 그런 식의 보복이 반복되면서 6·25 기간 중 수많은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이 전개된 양상은 대개 패턴화되어 있었다. 인민군에 밀려 급히 퇴각하는 군경이 좌익들을 학살하고, 피해를 입은 집안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면 다시 마을의 우익 인사를 보복 학살하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 또 다시 좌익을 보복 학살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어느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1년에 두어 차례 여러 집안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날만 되면 마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고 한다.

북한만 인민의용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 전황이 워낙 급하다보니 남한의 징병도 마구잡이 식이었다. 피난행렬을 세워 놓고 젊은이들을 색출하여 끌고 가고, 마을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끌고 가고, 학교 정문에 트럭을 세워놓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차곡차곡 싣고 간 경우도 있었다.




사건에 대한 올바른 평가


학살은 어느 경우에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발생한 다시는 있어선 안 될 비극이다. 그러나 그 발단과 전개과정에 이승만이 개입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승만이 이런 사건을 명령할 이유도 없다. 모두 당시 국회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므로 그건 분명하다.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좌익·용공 세력은 남한 내에서 잔인무도한 학살극을 벌였다. 좌익 세력에 의해 가족·친지를 무참히 살육 당한 이들은 울분했고 복수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좌익 세력의 책동에 대한 국민들의 과격한 반작용이었고,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 또한 많이 나왔다. 이와 함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방아쇠가 되었던 6·25전쟁을 일으킨 자는 북한의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남한 내 좌익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적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갓 태어난 국가가 다시 소멸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는 당시의 시대상황, 그리고 국가 전체가 악취가 진동하는 가난과 부패에 찌들어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근본적으로는 바로 김일성·스탈린·모택동과 같은 20세기 3대 악당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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