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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관련 진실] 국민 방위군 사건의 진상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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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치하의 비극인 건 사실이나 李대통령, 사건 주동자 ‘사형’으로 강력 처벌

국가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의 책임, 대통령 일인(一人)에게 전가할 수 있을까?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정부패로 인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사건 주동자들에게 사형 등 강력한 처벌을 내렸지만, 사건 발생 67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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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집된 국민방위군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국군은 전쟁 초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며 수세에 몰린다. 그러나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국군은 9월 28일 서울 수복, 10월 1일 38선 돌파, 10월 26일 압록강 변까지 북진한다.그런데 10월 18일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며 전세는 재역전된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연합군(국군·유엔군)은 계속해서 후퇴했고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 국민방위군은 이런 전황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울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을 모집한다. 여기에는 연합군의 후퇴 과정에서 남한 장정들이 공산군으로 징병될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국회는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고 같은 달 21일 법안은 공포 실시된다. 병력 모집을 시작하자 지원병은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어섰다.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50여만 명이 모집될 것을 가정하고 후방 지역에 50여 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 1개 교육대 당 1만여 명을 수용할 계획이었다.문제는 급박한 전황 속에서 입법을 진행하다보니 예산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수십만 명의 장병들을 한반도 이남으로 도보 이동시키면서 음식과 군복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 때는 12월 겨울이었다. 군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입대했던 장병들은 굶주리며 추위에 떨어야 했다. 살아남아 후방 육군 교육대에 도착한다 해도 이들을 수용할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아사(餓死)·동사(凍死)·병사(病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확인할 수 없지만 2010년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최대 8만 여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조사와 책임자 처벌


조사 결과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국민방위군 예산 중 약 25억 원의 국고금과 물자를 착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서류를 날조해 부정으로 축재(蓄財)했고 횡령금의 상당액이 당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로 유입됐다고 한다.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사건을 축소·종결시키고자 했다. 군사법정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다. 이에 국민 여론이 들끓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장관을 전격 경질한다.

재조사 과정을 거쳐 재판이 재개되고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 5인(김윤근 사령관, 윤익헌 부사령관, 강석한 재무실장, 박창언 조달과장, 박기환 보급과장)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이시형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올바로 보좌하지 못했다며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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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등 5인 총살형 집행 순간 (사진: KBS 방송)



사건에 대한 올바른 평가


서두에서 밝혔듯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부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의 책임을 이 대통령 일인에게 전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소위 ‘김영란법’ 등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는 제도와 법안들이 구비돼 있다. 그리고 건국 당시와 비교해 공직자들의 수준과 윤리 의식도 높은 상태다.


초대 정부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보면 당시 공직자들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공개된 일화를 소개한다.

<건국 직후부터 국내에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나왔다. 미국도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해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미국 측에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만든 해군 기지였던 진해를 미군에게 맡기고 군사원조를 받으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반도에 미군을 끌어들이고 달러도 벌어서 맨 주먹뿐인 군대를 무장시키려고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런데 국가의 운명이 걸린 대통령의 밀서를 가지고 가던 외교관이 사고를 쳤다. 중간 경유지인 일본에서 기생들과 놀아나다가 대통령의 친서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 이 나라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 훈련된 외교관 한 사람 없는 형편이었다.하는 수 없이 이승만은 여류시인 모윤숙에게 밀서 전달을 맡겼다. “윤숙이,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돼요. 뉴욕이 존 스캐거 씨에게 꼭 전해야 합네다.” 문서를 건네주는 노(老)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시인까지 동원한 대통령의 간청은 거절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내각에서 ‘친서 전달’ 하나 맡길 변변한 공직자 한 명이 없었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에는 국정을 맡길 만한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비극적 사건도 발생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대통령은 사건의 주동자를 엄히 처벌했을 뿐 아니라 국방장관까지 경질했다. 이 대통령이 국민방위군을 고의로 굶겨 죽였다든지, 부패의 원흉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고 ‘모욕’이다. 현 문재인 대통령 치하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비리 문제가 다 문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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