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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첫 만남

    내용
    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전시관과 기념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관리, 건강상의 비결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듯 싶은데요]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 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 부터 55년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라 뤼씨]의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각국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등 각방으로 활약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성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뒤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푸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마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클럽에서 보내주어 읽어있던 [코리아]라는 책 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말이 생각났다. 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선전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것 같았다.
    그 때 지배인이 베른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 분은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떳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 실린 그분의 사진과 신문 한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속에서 정식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사도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딸 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 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우기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 대용으로 날 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맛나는 사워크라푸트 한병을 그분에게 전해주도록 호텔 고용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하며 회한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해인 1934년 10월8일 하오 6시 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텍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헤인즈.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 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남편은 그간 해외에서 30여년을 독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생일날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생일날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과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서 기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된것을 그분은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하며 감사했다.


  2. 2. 신혼시절

    내용
    지금와서 회상해보면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투사의 국제결혼에는 남다른 어려움과 말 못할 사연이 많았다.
    특히 결혼 직후 나를 가장 서글프게 했던 일은 하와이 동포들이 나의 남편에게 [혼자만 오시라]고 초청전보를 보내왔을 때였다. 그분을 보필했던 동지들이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번씩이나 보내왔을때 나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 여행에 서양부인인 나를 동반해주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몹시 마음을 죄고있는 나에게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 여행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이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동포구경꾼들이 부두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이박사가 데리고 온 서양부인에 대한 동포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당시 하와이에 있던 한국동포 1천명 이상이 모여 큰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 뜻밖의 모임에서 우리부부에 대한 동포들의 노여움이 다소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자기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거나 맛있는 한국음식과 김치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먹어보고 그 매운맛에 정말 혼났다. 김치도 매웠지만 고추장은 입안에서 폭탄이 터지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김치와 고추장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기 때문에 만드는 법을 자세히 배워두었다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곧 김치부터 담가보았다.

    내가 담근 첫번째 김치맛은 남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공작이었으나 고추장은 실패작이었다. 이 후로도 내가 담근 김치는 남편은 물론 당시 장기영씨와 임병직씨를 위시한 한국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다. 지금의 유학생들과는 달리 김치를 담가 먹기 힘들었던 한표욱씨 같은 동포 유학생들에게도 나는 김치를 담그면 가끔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신혼생활을 시작할 무렵 남편은 나에게 [한국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 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 대견해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남편들은 미국 남자처럼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일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그분은 여러번 나에게 일러주었다. 아뭏든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고 그분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신혼 초에 우리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그 때 윤치영씨 내외를 방문했었는데 윤치영씨 부인이 내게 예쁜 한복을 선사해서 입어보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복을 입은 내모습을 보고 남편은 무척 흐믓해 하였고 나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 내가 한복을 즐겨 입게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의 결혼식 때 나에게 한복웨딩드레스를 지어 입도록 부탁한 남편의 뜻을 따라 남궁엽씨 부인과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하얀 천으로 한복을 만들다가 그만 실패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다행히도 아들 인수가 결혼식을 올릴때 신부가 아름다운 한복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한국의 아름다운 신부들이 서양식 웨딩드레스보다는 한복웨딩드레스를 입는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하고 생각해 본다.

    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던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고 재치있는 여자로 생각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농담을 했다. 잠시도 쉬지않는 부지런한 성격에다 건강하고 패기에 넘치는 59세의 신랑에 비해 34세밖에 안된 나는 신경성 위병에다 변비로 신혼초에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후 매일 새벽 남편이 권하는 냉수를 마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보니 내병은 완쾌되고 건강도 좋아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보던 성경을 우리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가끔 읽어주곤 한다.

    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때마다 신경을 써야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 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등 오대양과 각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 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서른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30여년을 줄곧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신혼시절 내가 마련한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분이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남편이 가정의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엄수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맨 처음 내가 한국에 왔을때도 나는 남편이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 일로 이해 남의 빈축도 샀고 남편으로부터 여러번 책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편은 늘 학생처럼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꾸준히 공부를 했다. 나와 결혼한 후 80이 넘을때까지도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며 틈나는대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남편이 붓글씨를 연습할때는 언제나 내가 곁에서 먹을 갈아드렸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함께 쉬지않고 노력하며 일하는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것 같았다.

     
  3. 3. 가난한 독립운동가

    내용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자란 나에게는 낯선 미국에서의 궁핍한 결혼생활이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것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남편은 언제나 그분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곧 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먹는다]는 한국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던 남편으로부터 나는 가난한 생활을 품위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 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신혼시절의 내 꿈은 하루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집을 갖는 것이었다.

    지금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워싱턴에 살던 시절 남편과 함께 눈을 치우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않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집 앞의 눈을 치웠다. 그 당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은 우리집 단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남편과 같이 했던 일은 내 가슴속에 줄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독립운동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때 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기자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 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 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 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 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 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 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 때부터 자동차 운전만은 꼭 내가 해야되겠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남편으로부터 자동차운전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살았구나] 하고 정신이 드는 남편의 차에는 나 이외엔 누구나 타기를 꺼렸다. 그러나 내가 운전할 때는 비단결 처럼 곱게 몬다고 남편은 나를 [실키 드라이버]라고 불렀다.

    운전대를 잡으면 폭풍 처럼 격렬하게 달리지만 붓글씨를 쓰거나 시를 지을때는 남편은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했다. 늘 젊고 건강했던 남편의 특이한 성품은 무엇에나 열중하면 그 일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책을 보거나 붓글씨를 쓸때 한번 정신을 집중하면 옆에서 창문이 깨져도 몰랐다.

    일평생을 온갖 풍상 다 겪으며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해온 남편이 그토록 건강했던 것은 늘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지내는 어릴 적부터의 생활습관과 편안하고 욕심없는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낚시질할 때는 고기를 낚아서는 도로 놓아주고 오직 낚시질만을 즐겼다.
    남편이 항상 낚은 고기를 도로 물에 놓아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왜 애써 잡은 고기를 놓아주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남편은 [나는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즐기려고 낚시질을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항상 바쁜 일정을 나누어 주말이면 남편은 한국학생이나 동지들과 낚시하러 포토맥 강변이나 호수가로 나갔다. 미국에서 낚시할 때면 남편은 가끔 한강변의 광나루 낚시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와 함께 미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도 남편은 늘 자기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려서 연 날리기하며 뛰어놀던 남산과 복숭아꽃이 만발하던 고향집과 동네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따먹던 복숭아와 사과 얘기를 할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어디 가나 남편은 철따라 나무와 꽃가꾸는 일에 열심이었다. 남편이 어찌나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잘가꾸는지 일류 정원사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남편을 아는 수목전문가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일을 남편에게 물어오기도 했다.

    남편은 늘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사람은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산다]고 하면서 [항상 우리나라의 나무와 흙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하라]고 일러주었다. 남편은 미국이나 하와이의 동포어린이들과 함께 <아리앙>과 <도라지타령>을 잘 불렀고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가려고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님편은 늘 [욕심내고 화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비결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남편은 말해주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청년시절 집안 어른들로 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는데 구국운동할 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 후 귀국해서 가끔 윤석오씨와 이기붕씨 집에서 정성껏 담가보낸 막걸리를 [불로장수주]라고 남편은 나에게도 조금씩 권하며 즐긴 적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수가 있겠는가]고 막걸리는 물론 다른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언젠가 어느 애주가 친척이 와서 나에게 [만일 대통령이 술을 좀 마셨더라면 한국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술과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우리 역사에도 보탬이 됐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남편은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장작을 열심히 팼다. 장작패는 일은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해왔다고 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없는 설움과 냉대를 받으며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려 온 남편에겐 장작패는 습관이야 말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건강을 지켜준 비결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화나 울분은 참는 것보다 빨리 풀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독립운동하던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시나 남편은 틈나는 대로 나와 함께 맨손체조를 하거나 산책을 했고 정구를 즐겼다.


  4. 4. 날 된장에 밥 한 그릇

    내용
    결혼 후 나는 맨 처음 남편의 짐을 챙기면서 "어쩌면 남자가 이렇게 꼼꼼하고 알뜰한 면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놀랐다. 밤낮 바쁘게 돌아다니며 한평생 독립 투쟁을 해온 외통이 나그네의 짐이라 초라하긴 했지만 너무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결혼 후에도 "내 집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테니 염려말라"고 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귀찮게 생각할 정도로 남편은 혼자 사는데 익숙해 있었다.
    연애시절 남편은 나에게 "과부주머니에는 은이 서말이고 홀아비주머니속에는 이가 서말"이라는 한국 속담을 가르쳐주면서 자기 주머니속에 담고 다니던 작은 참빗을 꺼내어 보여주며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하고 진지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내 빈주머니를 보여주면 현명한 여자는 달아날 줄 알았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쁜 [혹] 하나가 생겨서 이토록 내가 힘들게 살고 있다"고 남편은 나에게 농담을 하곤했다.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하며 남편이 소중하게 웃저고리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며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날때까지 간직했던 그 참빗은 어머님이 남겨주신 물건이었다. 이 참빗은 어찌나 빗살이 작고 촘촘한지 "어렸을 적에 어머님이 머리를 빗겨주시면 아파서 울기도 했다"고 남편은 어린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나에게 얘기 해준 적이 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남편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자녀를 모아 우리말을 가르치고 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이 빗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이와 서캐를 잡아주기도 했다.
    6.25동란을 치를 때는 부산 임시관저의 주변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전쟁고아들의 머리에서 이와 서캐를 남편은 그 참빗으로 흝어준 적도 있다. 
    하와이 병실에서 그토록 고국을 그리워하던 남편은 마음이 울적할때면 이 빗을 만지며 향수를 달랬다.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 곳에서 남편이 외롭게 별세한 후 줄곧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는 그 참빗을 며느리에게 맡겨두었다. 나는 이 참빗을 보면 남편과 함께 지내온 세월의 한맺힌 마디마디가 떠올라서 눈물로 목이 멘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건국대통령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그럴듯한 거짓말을 쓰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글쓰는 사람이 양식이 있다면 역사의 현장에서 똑똑히 지켜본 증인들에게 진실과 사실을 확인한 후에 책임있는 글을 쓸 것을 권유하고 싶다.

    지난번 나는 모 텔레비전이 방영한 1950년부터 1951년까지의 6.25동란 기록필름을 지켜보았다. 나는 남다를 감회를 느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런데 기록필름을 상영할때는 그 당시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할텐데 멋대로 편집하고 해설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기록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그당시 전쟁의 참화는 훨씬 더 비참했고 국민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유엔군과 우방의 원조는 받았지만 한국인들의 줏대와 배짱은 꿋꿋했고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국민들의 도의심은 살아있었고 여성들의 정조관념도 대단해서 어느 유엔군 병사가 껴안았던 서울의 한 처녀는 그 수치심을 못이겨 한강에 투신자살까지 했었다.

    6.25때 나는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매일매일 겪었던 일들을 타이프해 놓았다. 날마다 손끝이 부르트도록 타이프해 보낸 편지와 일기를 보면 지난 일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수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남침했던 공산군을 맨손으로 막아야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을 전화로 불러내어 호통치던 대통령을 만류하던 일, 27일 새벽 남하하는 기차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다"고 고뇌하며 괴로워하던 대통령의 모습, 단돈 5만원을 가지고 떠났던 피난길,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용변을 봐야했던 시골변소, 이리역 구내에서 나눠먹던 건빵, 대통령이 권하는 건빵을 받아들고 눈물을 억제하던 일....

    목포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와 풍랑이 심하여 모두 배멀리로 쓰러졌지만 75세의 남편은 혼자서 계속 꿋꿋하게 버티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초죽음이 된 나는 물론 수행원들까지 신음하며 노란물을 토하고 쓰러지자 백발의 대통령이 일일이 돌보아 주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인자하셨던 어머님을 생각해 봐. 그러면 속이 좀 가라앉을 걸세"하며 젊은 수행원들을 격려하던 남편의 다정한 음성이 아직도 내 귀에는 들려오는 것 같다. 남편은 배 안에서 일행들을 돌보느라 눈 한번 안붙였다. 함정에서는 군인식사와 똑같이 했다. 꽁보리밥에 짠지, 날 된장이 전부였다.
    일행 모두가 음식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오직 대통령 혼자서 밥을 한알도 남기지 않고 한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밥그릇을 깨끗이 비울수 있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반찬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다. 병영을 돌아다니면서 일선장병이나 유엔군 장병들과 식사를 할 때 "노인이 웬 식욕이 저토록 좋은가!" 하고 놀라는 외국장군들의 감탄사를 엿들을 때 아내로서 약간 창피할 따름이었다.

    대구에서 나는 심한 설사로 큰 고생을 했다. 물을 갈아먹은 탓인지 3일동안 꼼짝없이 누워있는 상태가 됐다. 피난 중 심한 긴장과 더위 때문에 탈진 상태에다 대구지사 관저 뒷마당에 있는 펌프물을 마신 때문에 배탈을 얻은 것이다.

    남편은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의 몸은 40도가 넘는 열로 종종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경북지사였던 조재천씨 부인이 정성스레 콩나물국을 끓여왔다. 파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장국이었다. 몇모금 마시니 속은 한결 부드러웠다. 나는 이 국물을 두어모금 마신 후 두었다가 남편에게도 권했다. 남편은 이 국물을 받자 "마미, 당신이나 마실 일이지...." 하면서도 단숨에 국그릇을 비웠다. 콩나물국을 받아마시는 남편을 보고있던 나는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대구 피난시절 임시관저에는 우리 부부를 비롯해 각료, 비서관, 경호경찰, 국회의원 등 70여명이 북적거렸다. 이들의 뒤치닥거리를 조지사 부인이 가정부 2명을 데리고 맡아서 해주었다. 당시 남편은 양복보다 모시옷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는 모시옷을 어떻게 매만지는가를 몰랐다. 빨래에서부터 풀을 먹여 다림질까지의 모든 일이 나에게는 너무나 서툴렀다. 이때 조지사 부인은 이런 일들을 모두 도맡아 해냈다. 참으로 고마웠다.

    70여명이 넘는 임시관저의 사람들의 식사며 잔 심부름까지 해냈던 지사부인은 과로로 유산까지 했으며 손발이 퉁퉁붓고 거동조차 어려웠으나 꾹 참고 일을 해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됨을 가장 가슴 아파하던 남편은 어느날 나에게 달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면 그만큼 조지사 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일감을 줄여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다음날 아침식사부터 사과와 토마토 그리고 날달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또 매끼 반찬도 세가지만 하도록 했고 모시옷도 빨아서 그냥 입었다. 이런 남편의 부탁은 자신이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되며 그렇데 되면 지사부인의 일손을 덜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남편의 이런 뜻을 잘 알아 차리지 못한채 그전처럼 식생활을 했고 신국방장관은 아침 5시반만 되면 나타나 날달걀이 아닌 반숙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즈음도 서울에 살고 있는 조지사 미망인 강재례여사가 종종 나를 방문하면 피난시절 고생했던 얘기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몇 해전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할 적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서로 얼싸안고 울고웃는 이산가족들을 따라 함께 울면서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걱정하며 보고싶어하신 친정어머님을 생각했다.
    나는 이박사와 결혼한후 늘 마음 속으로 생각은 있었지만 끝내 어머님을 생전에 찾아뵙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TV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님,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해 주세요!"하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내가 노후에도 한국에 와서 이토록 행복하게 살고있는 모습을 보신다면 모든것을 용서해주시리라 믿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나의 친정이 어느나라인가를 물어오는 시민들의 전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호주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친정은 호주가 아니고 유럽에 있는 음악의 도시 '빈'이 있는 오스트리아 이다. 나의 친정집은 아름다운 숲이 있는 '빈'의 교외에 있었다.


  5. 5. 경무대의 단골메뉴

    내용
    내가 아내로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첫 월급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 남편은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어려운 나라실정과 자기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고 일하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이 담긴 이 붓글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남편의 대통령 재임시 경무대에서 식사는 주로 내가 마련했고 우리의 내의와 양말도 꼭 내손으로 빨았다. 남편의 뜻에 따라 비싼 고기류는 명절과 축일 또는 손님 접대할 때만 사왔다. 대통령은 보통가정의 평범한 음식인 물김치, 콩나물,두부, 김, 된장찌개, 생선구이 같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집의 단골반찬은 이런 정도였다.
    지금도 우리집에서는 콩나물을 길러먹고 두부도 만들어 먹고있다. 아침은 쥬스나 차와 함께 빵과 삶은 달걀을 들었다. 점심은 감자가 주식이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들거나 현미, 보리, 콩들을 섞은 잡곡밥을 지었다.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대통령을 위해 나는 달걀프라이 보다는 새우젓국물로 간을 맞추어 달걀찌개를 만들었다. 옛날, 대통령의 어머니는 달걀찌개와 두부찌개를 새우젓을 넣고 만드셨다고 친척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두부찌개에 고추장을 넣어서 끓이기도 했지만 새우젓 국물에 끓이는 때가 더 많았다.
    두부찌개는 풋고추와 파를 듬뿍 넣고 함께 끓였을 때 남편의 칭찬을 받았다. 워낙 식성이 좋았던 남편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고 콩 종류와 나물 종류는 무엇이나 좋아했다. 특히 산채와 죽순은 신선들의 불로 장수식이라고 귀히 여겼고 이른 봄에 산과 들에서 캐온 향긋한 봄나물과 냉이국은 남편을 즐겁게 해준 경무대 식탁의 별미였다. 한식은 다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약과와 튀각과 약식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어란을 좋아했고 해산물과 생선찌개를 좋아했기 때문에 친척들은 가끔 이런 음식들을 대통령에게 보내왔다. 대통령은 팔도토박이 음식을 선물해주는 분들을 제일 고맙게 생각했다.
    특히 생신날 약과와 함께 빈대떡과 전과 약식을 함께 한채반에 만들어서 가져오는 종가댁 아주머니들을 대통령은 무척 반가워했다. 항상 모든 면에서 검약하는 대통령이지만 잔치에는 음식이 넉넉해야 한다고 하면서 [내 생일 차려주시느라고 애쓰신다]고 치하하며 고마워했다.
    나 역시 남편의 생신날 음식을 차려오는 분들이 제일 반갑고 고마웠다. 
    이토록 정성들여 맛있는 음식을 차려오는 친척들이었지만 대통령은 가까운 친척들을 정부요직에 기용하거나 특별배려를 해준 적이 없다.
    후진국 족벌체제를 가장 싫어한 대통령의 이런 냉정함 때문에 은근히 불만이 있던 친척들은 서양아주머니인 나를 오해하기도 했다. 남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정부요직에 기용할 인물들을 물색할 때였다.
    정인보선생과 함께 감찰위원장 물망에 가장 많이 올랐던 분중에 이승국씨가 있었다. 이분은 집안의 동생뻘 되는 분으로 대통령과 어렸을 때부터 무척 다정한 사이였다. 학식도 있고 사회적인 덕망이 높았으며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었다.
    대통령은 젊은 시절 이승국씨와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다는데 다만 술이 좀 과한 것이 흠이라고 했다. 이승국씨가 특별히 과음을 하거나 주벽이 없다면 정부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유능한 분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대통령은 맛좋은 술을 준비해서 이승국씨를 이화장으로 초대했다.
    남편은 이승국씨를 현관에서 맞으며 [아우님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 구먼]하고 반기면서 특별히 안방으로 안내하여 미리 마련한 주안상을 내오도록 하였다. 남편은 이승국씨에게 술을 먼저 권하며 [나는 중요한 손님을 만나야하니 먼저 드시게]하며 자꾸 권했다.
    [허물없는 처지인데 사양할 것 뭐있나. 천천히 마음놓고 들게. 내 금방 돌아올테니 염려말고 마시고 있게]하고 이범석씨가 기다리고 있던 응접실로 들어갔다. 기분이 무척 좋아진 이승국씨는 안타깝게도 형님의 마음을 전혀 모른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범석씨가 돌아가고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술병은 한방울도 남김없이 비어있었다.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난 이승국씨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이승국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대통령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정부요직에 기용은 안했지만 친동생처럼 아꼈던 이승국씨는 [국추회]라는 애국단체를 이끌다가 6.25동란때 납북되었는데 남편은 늘 가슴 아파했다.

    대통령은 젊어서 한때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도 짓고 즐겼는데 구국운동하면서 [나라위해 중요한 일 할때 술 마시다 실수하면 안된다]고 술을 끊었다고 한다. 경무대에서 손님을 초대할 때도 술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술없는 경무대 파티에 익숙한 외국분들은 초대받으면 미리 한잔 씩하고 오는 분도 있었다고 한다. 경비절약을 위해 술을 뺀 경무대 초대연은 나름대로 외국 귀빈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준 모양이었다. 각기 보는 인상은 다르지만 지금도 워싱턴의 친한파 명사들이 모이면 [구두쇠대통령]을 위해 자기들끼리 모여 건배를 했던 옛 추억과 그 시절 얘기를 나눈다고 다울링 대사부인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경우에 따라 외국손님에게 술을 대접할때는 우리나라 고유의 과일주나 <불로장수주>라는 막걸리를 내놓았다. 시인이나 화가에겐 특별대우를 했다. 예술가와 문인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술대접을 할 때가 있었다. 특히 남편이 좋아했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고종황제께서도 술을 선사해야만 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호탕한 기질의 장승업은 술을 마셔야만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서 대통령은 나를 애먹이는 [술고래]였던 경무대의 요리사 양학준노인을 늘 두둔해 주었다. 대통령이 요리사 양노인을 감싸주는데는 사연이 있었다.
    나이는 대통령보다 몇살 아래였다. 일찌기 자식하나를 두고 상처한 뒤 자식마저 살림을 차려나가자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대통령은 늘 쓸쓸해 보이는 양노인을 감싸고 돌았고 6.25 동란 중 피난갈 때도 가정부 대신 양노인을 데리고 갔었다. 그는 얼굴생김이나 풍채, 희끗희끗한 머리가 대통령과 비슷한데가 있었다.

    임시 관저에서 피난살이 할 때 미8군에서 고기류와 빵을 보내오고 시민들이 대통령을 위해 지게에다 감자.옥수수.달걀.닭 등을 지고 와서 두고 간 적이 있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이 생기면 전방의 병사들과 신병훈련소의 배고픈 아들들을 생각했다. 대통령은 양노인을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수고좀 해주어야겠어. 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자네의 훌륭한 요리솜씨로 우리 애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겠네] 신병훈련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특식을 제공한다는 연락을 받고 군악대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양노인이 음식을 먼저 챙기기 위해 발판을 내려섰다.
    군악대는 환영연주를 시작했다. 양노인을 대통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양노인은 당황해서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군악대는 대통령이 환영연주에 답하는 줄 알고 더 신이나서 나팔을 불어댔다. 이 헤프닝이 있고 난 뒤 [자네는 음식대통령이야, 내 시찰 때 함께가서 애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면 군악대가 먼저 환영할 사람은 자네일쎄]하고 말하면서 대통령은 양노인을 수시로 데리고 다녔다.
    대통령과 달리 나는 양노인이 별로 탐탁치 않았다. 그는 나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했고 모든 면에서 절제하고 아끼는 경무대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평소엔 조용했지만 술만 마시면 주벽이 있어서 밤늦게 주방으로 직원들을 모아들여 냉장고의 식료품을 꺼내어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나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어느집 주부든지 이런 기분은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날 밤 11시가 다 되어 주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양씨가 술에 취해 [자선파티]를 열고 있었다. [소금 조금] [간장 조금] 하고 내 흉내를 내면서 웃는 소리가 났다. 가정부가 걱정이 되는지 [대통령사모님에게 들키면 어떡하려고 이러세요]하자 [내 빽이 대통령인데 <깍쟁이 사모님이 어쩌겠어>]하며 큰 소리를 쳤다.
    나는 깍쟁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그때까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양씨가 나더러 깍쟁이라는데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살림 잘하는 알뜰한 부인네를 칭찬하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나는 그말이 좋은 뜻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식사전엔 꼭 기도를 올렸고 성경책은 식탁 옆 찬장 서랍에 넣어 두었다. 한번은 술에 취한 양씨가 그 성경책을 베고 코를 골다 나에게 들켰다. 나는 대통령을 모시고 와서 보여주었다. 남편은 상보를 접어 베개를 만들어 양씨에게 받쳐주고 성경을 빼내며 [참좋은 사람이야. 술을 마시고도 성경을 보더라니]하며 빙긋이 웃었다. 대통령과 요리사가 아닌 노인네끼리의 따듯한 우정을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6. 6.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내용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하던 시절, 우리는 독립지도자의 체면에 알맞는 호텔에 유숙했지만 식비는 아껴야 했다. 영양가 높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바나나가 미국에서는 값이 쌌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바나나와 날달걀로 끼니를 떼웠다.
    날달걀을 먹을 때는 껍질이 남의 눈에 띄지않게 종이에 싸서 버렸다. 날달걀을 먹는 것은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서양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6.25 동란때는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에 갔다가 끼니를 놓쳐서 종종 굶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호주머니 속에사 잣을 넣어드려 시장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6.25 동란이 났던 1950년의 추석날에는 청도 피난민 수용소와 경산 전재민들을 방문했는데 [명절날이니 점심준비는 안해도 될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점심준비 없이 떠났다가 우리는 물론 수행원들까지 점심을 굶겼었다.
    마침 대통령의 호주머니속에 들어있던 잣 때문에 우리는 겨우 시장기만 면했다. 저녁이 다될무렵 부산임시관저로 돌아왔을 때 양성봉지사부인이 차려놓은 추석음식을 우리는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잣은 그해 여름 우리가 경북지사관저에 있을 때 서울시장 이기붕씨 내외가 대통령에게 드리라고 한봉지를 구해서 가져왔었다. 
    대통령은 선물을 받으면 꼭 답례하는 습관이 있었다. 
    잣을 가져온 이기붕씨네 어린 두아들 강석과 강욱에게 갖다주도록 참외를 사기위해 대통령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구거리로 이기붕씨와 함께 나갔다. 참외는 1천원에 7개였다. 대통령은 1천원어치 참외를 산 후 참외장수에게 [덤으로 하나만 더 주시오]하며 덤 한개를 집으려하자 참외장수는 [할아버지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며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뺏더라는 것이다. 
    피난살이 하는 이기붕씨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지만 풀 안먹인 후줄근한 모시남방 차림의 노인이었으니 경호원도 없이 나간 대통령과 서울시장 일행을 참외장수가 알아볼리가 없었던 것이다. 겁도 없이 걸어서 대구거리로 나간 대통령과 이기붕씨가 염려되어 우리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보자 대통령은 [마미, 참외 덤한개 얻으려다 순사한테 붙잡혀 갈뻔했어]하고 웃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대통령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파장이 된 저자거리에서 시골 참외장수에게 덤한개 얻으려다 빼기고 온 대통령이었지만 바로 그 대통령을 중공의 모택동주석이 가장 무서워했다고 한다. 중공의 모택동 측근에서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홍콩으로 탈출해 나왔던 주경문이라는 중국 사람이 쓴 책에서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동양의 인물은 한국의 리승만대통령]이라고 쓴것을 나는 읽었다. 

    우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던 미국 상원의 프레드릭 브라운 해리스목사는 [내가 아는  리승만대통령은 가장 선량하고 성실한 한국 신사]라고 평했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백발의 대통령을 무서운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무로 대통령과 면담을 해야했던 미국의 지휘관들과 대통령 특사나 각국의 대사들은 나를 대통령의 마음을 측정하는 측후소로 여길 정도로 대통령의 심기를 살폈다고 한다. 
    즉 관상대에서 날씨를 예보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대통령곁에 나타나는 날은 청명한 날씨로서 면담 분위기나 결과도 좋다는 것이고 얼씬도 안하는 날은 찬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뒤덮이며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라고 새로 부임해오는 인사나 외국특사에게 서로 귀띔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런 줄은 짐작도 못했지만 회고해보면 많은 외국 귀빈들이 내가 접견실의 대통령곁에 나타나면 무척 반가워 했던 것같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던 워커 장군이 의정부 근방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한 뒤 후임으로 온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에게 첫 인사를 왔을 때였다. 

    중공군을 맞아 싸우기 보다는 후퇴만 하고 있던 유엔군의 전술을 대통령은 의심하고 있던 때였다. 전략이라고 해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곤란과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라고 대통령은 역정을 내며 불만이 컸었다. 작전상 후퇴라고는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지면 외국 군대가 국군처럼 최후의 일인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더우기 연합사령부의 참모들은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지웨이 장군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부임해 오는지 우리는 걱정이 되었다. 사진으로 본 리지웨이 장군의 인상이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대통령은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마찬가지 일것이라고 별로 탐탐치 않게 여겼었다. 무초 대사와 함께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을 뵈러왔을 때 대통령은 표정없이 담담한 태도로 장군을 맞이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좀 긴장한 기색을 보였는데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나서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입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고야 말겠습니다.]하고 군인답게 말했다. 
    장군의 이 결의에 찬 말을 들은 대통령은 힘차게 장군의 손을 잡고 나를 불러 소개했다. 그리고 제일 맛있는 차를 끓여 오라고 나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자기의 말에 만족해하는 것을 보고 리지웨이 장군은 시종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 리지웨이 장군의 기뻐하던 모습과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선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8군을 재정비하여 공세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던 리지웨이 장군은 그후 곧바로 중공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대통령은 아들처럼 사랑하며 신뢰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8군의 책임자로 왔던 밴플리트 장군, 렘니쩌 장군, 테일러 장군 및 언커크의 책임자로 왔던 콜터 장군 등 유엔군 장성들과 미국 대사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23년이 되는 지금에도 이중 생존하고 있는 미국의 장군들과 친지들은 거의 모두 나의 생일까지 기억해주고 크리스마스와 새해인사를 적은 카드 속에다 그 당시의 추억들을 적어 보내어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로 와서 대통령이 반대했던 휴전회담 때문에 가장 많은 시달림을 받고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던 마크 클라크 대장이 지난번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TV인터뷰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의 애국자 리승만 대통령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최신무기로 무장한 유엔군에 고추가루를 얼굴에 뿌려 쩔쩔매게 만들었던 한국의 기발한 고춧가루작전이 성공시킨 반공포로석방 소식에 입에 물고있던 담배파이프를 떨어뜨렸던 클라크 대장이 이렇게 회고한 것이다. 

    또한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한국의 리승만 대통령같은 지도자가 월남에도 있었다면 월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하는 것도 읽어, 나는 한국의 노대통령에게 그토록 혼이나고 시달림을 받았던 미국의 장군들이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증언을 할 수 있는지 마음 속으로 고마웠고 그 훌륭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6.25 동란 당시 대통령에게 가장 호된 시련을 받았던 노총각 대사 무초씨가 몇 년전에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이화장으로 나를 방문해 주어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피난수도 부산에서 [언제 갈지 모르는 힘없는 노인]이라고 대통령을 비난했다가 무초 대사는 혼이 난적이 있었다.

    대통령은 무초 대사와 밴플리트 장군과 콜터 장군을 진해별장으로 초대하여 낚시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 때 바다낚시를 즐기자고 하여 대통령은 조그만 목선을 준비하였다. P.T정을 타고나간 일행이 낚시를 위해 목선에 갈아타자 파도와 풍랑이 거세어져 배가 몹시 흔들렸는데도 대통령은 멀리까지 나갔다.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무초 대사는 배멀리를 시작했다.
    그래도 대통령은 더 멀리 나갔는데 대사는 어찌나 배멀미를 힘하게 했던지 토하다 못해 바지까지 흠뻑 적시고 말았다. 대통령은 그제서야 반 죽음이된 대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당신은 나이 많은 나보다도 약하구려! ]하고 웃으면서 배를 저어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독립운동당시 경비를 절약하려고 선임이 제일 쌌던 작은 배 엔터프라이즈호를 하와이에서 타고 승객 16명과 함께 열 흘간이나 거센 풍랑을 견딘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달한 일이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이 고생스런 선편을 이용해야만 했던 대통령은 거센풍랑이 일때 작은 배에서 받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무초 대사는 그때부터 고분고분해졌다. 

    한국에 미군정책임자로 와서 자기 생애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보냈다고 회고했던 하지 중장은 [억만달러를 준다고 해도 리승만박사 같은 한국지도자를 상대해야했던 군정은 다시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고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말한 것을 읽은적이 있는데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익에 저해되는 미국의 한국정책 때문에 하지 중장을 몰아세우고 쫓아내는데 앞장섰을 뿐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은 없었다.


  7. 7. 현미떡국과 건강차

    내용

    74세 때 대통령직을 맡았던 남편이었지만 남편이었지만 대통령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대통령은 여든두살때 그 높은 북한산 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가서 문수사를 찾아가 [문수사]라는 휘호를 쓸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남편이 병원과 의사의 신세를 졌던 일은 별로 기억이 안난다. 다만 남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이화장에서 우리는 이기붕씨의 소개로 당시 이화대학부속병원 의사였던 손창환박사를 알게 되었다.

    손박사는 이기붕씨의 위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주었던 훌륭한 의사였다.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내가 손박사의 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19531127일 장개석총통의 초청으로 자유중국을 방문했을 때와 195472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을 때 80세의 대통령은 주치의 없이 공식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혜로운 일은 아니었던 것같다. 


    나와 결혼하기전에 대통령은 병환이 나도 약을 사먹지 않고 견디며 자연치유 될 때까지 있었다. 수중에 약살 돈이 없을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통령은 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감기가 들면 맹물만 끓인 백비탕과 콩나물국이나 북어국을 들었고 의사의 지시나 약보다 재래식요법으로 병을 이겨냈다. 

    심지어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 목뒤에 큰 종기가 생겼을 때도 미국 의사가 수술을 권하자 우리나라 고약이면 수술않고도 나을 수 있고 고름만 짜내면 된다고 남편은 버티었다. 미국에는 고약도 없었지만 [수술을 안하시면 곤란하다]고 의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한참 후에 [만일 내가 당신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소?] 하고 물었다. 의사가 [지금 당장 수술을 해드리지요!] 하고 대답하자 [그럼 좋아수술하도록 하시오]하고 마취주사를 거절한 채 꼼짝않고 참아냈는데 담당의사는 [그토록 잘 참는 분도 못 봤지만 자기가 수술하면서 그토록 땀을려 본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1.4후퇴 때 이후 땔감이 부족해서 혹독한 추위로 누구나 고생이 극심할 때 부산임시관저도 몹시 추워서 내 손이 동상으로 여기저기 부어올라 중요한 기밀서신들을 타이프해야 했던 나는 무척 괴로웠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보시는 내 평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통령은 마는 껍질과 대를 삶을 물을 미지근하게 해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나는 그런 치료방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뜻에 따랐다.

    그 당시 우리 부산임시관저를 드나들면서 나에게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를 묻는 무초대사나 미국의 장군에게 부탁하면 동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연고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인 신세를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마늘대와 껍질을 삶은 물에 손발을 담그는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했었다. 

      

    회고하기조차 끔찍한 고통과 슬픔속에서 1.4후퇴를 했던 1951년 설날은 경황중에도 서울 경무대에서 안남미로 떡국을 끓여먹던 기억이 난다. 내가 써놓은 6.25일기를 들여다보니 대통령은 고깃국물이 아닌 북어국물로 끓인 떡국을 동치미와 함께 두 그릇이나 들었다고 씌어있었다. 대통령은 고기로 만든 음식보다 북어를 재료로한 음식을 더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어국, 북어찜과 북어무침은 우리집의 단골 메뉴일 뿐만아니라 북어머리나 껍질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경무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양노인이 북어머리를 열심히 모으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칭찬하는 것을 보고 나는 북어껍질까지도 함께 모았었다. 맨처음 나는 마음속으로 이 북어머리와 껍질은 끓여서 새밥에 섞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6.25동란이 일어나기 전 이른 봄 어느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양학준 노인이 경무대 주방에서 국끓이는 냄새가 나자 대통령이 잠옷바람으로 나가 한참동안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주방에서 대통령과 양노인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통령이 새벽의 찬기운에 감기라도 들까봐 잠옷 위에 걸치는 가운을 들고 주방으로 내렸갔었다. 그곳에서는 북어머리를 듬뿍 집어넣고 파와 고추를 썰어넣어 끓인 남비를 가운데 놓고 대통령과 양노인이 대접 가득히 담은 국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부였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양노인은 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와서 자기가 먹으려고 끓여놓은 해장국을 대통령에게 나누어 드린 것이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생선은 머리 부분이 제일 맛있고 소는 꼬리 부분이 맛이 좋다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그토록 대통령이 즐겨하는 북어탕에는 비타민 D와 칼슘이 풍부하여 몸에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후 나는 양노인이 넣은 재료 외에도 당근과 양배추와 고기를 더 넣어서 영양가가 훨씬 높은 국물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권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양노인이 자기 먹으려고 끓인 해장국을 더 좋아했다. 역시 한국 음식 맛을 내는데는 내가 양노인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떡국 솜씨만은 언제나 내가 제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특히 내가 만들어 낸 특제 현미떡국은 대통령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우리 이화장에서는 현미떡국을 끓여먹고 있는데 특히 아들과 큰 손자 병구가 할아버지 이상으로 현미떡국을 좋아해서 나는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 

    현미는 쌀눈에 모든 공해와 독을 제거해주는 휘친산이 들어있어 으뜸가는 건강 곡식이다. 현미로 지은 밥과 떡이 몸에 이롭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현미밥은 백미로 지은 밥보다는 덜 부드럽기 때문에 현미와 백미를 섞어서 밥을 지으면 한결 먹기가 좋고 현미로 백설기를 하면 밥보다 더 먹기가 좋았다.  

      

    특히 한국의 율무는 항암제이며 들깨는 만병예방식인데 날로 먹는 것이 특히 몸에 좋다고 한다. 나는 커피같은 자극성있는 차보다는 우리나라 재료로 대통령을 위해 여러가지 건강차를 만들어 드렸다. 여름에는 시원한 오미자차를 만들어 드렸고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차와 유자차를 끓여 드렸다. 모과차와 유자차는 맛과 향기가 좋아서 외국 귀빈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특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나에게 모과차 만드는 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요리를 부인보다 더 잘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불고기 양념하는 법을 나에게 물어서 가르쳐 드린 일이 있었다.

    특히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나는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눈차를 만들어 드렸다. 밀눈차는 고단백차로서 으뜸가는 영양차이다. 율무를 볶아서 율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서 끓이면 참으로 구수하고 맛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는 온상재배보다 값도 싸고 영양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무우 시래기나물.된장시래깃국.추어탕.선지국.비지찌개.냉콩국은 대통령이 즐겨찾던 건강영양식 이었다. 특히 밀기울과 함께 빻은 밀가루로 만든 수재비는 몸에 좋기 때문에 여름에 자주 해드린 음식중의 하나였다. 

      

    우리 내외와 친분이 두터웠던 청량리위생병원의 조지 루 박사 내외로부터 나는 많은 건강식과 식이요법에 대한 좋은 책을 많이 얻고 조언도 많이 받았다. 루박사 내외는 안식교의 독실한 신앙인으로 하루 두끼 식사를 하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않고도 단백질을 섭취하는 건강식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며느리에게 남편의 건강을 반정도가 아내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는 머리를 차게 발은 따뜻하게 해야 좋다고 해서 겨울에는 남편의 구두를 따뜻하게 관리해 신겨 드렸다. 식사는 기분이나 건강상태에 맞추어 조리방법과 식이요 법으로 조절해 드렸다. 내가 만든 영양식 외에 대통령은 약을 싫어해서 보약같은 것은 먹지 않았다. 남편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던 해에 86세였으나 그해 3월달에도 연날리기 대회에 하루 두번 씩이나 나가서 연을 날리고 연싸움에서 이길 정도로 건강이 좋았다. 

      

    4.19 학생 데모를 무력으로 진압하자는 측근들에게 대통령이 [피를 흘려서는 안돼! 불의를 보고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국민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야지]하고 하야한 후 무척 어려웠던 하와이 요양시절 가난한 우리에게 5년동안 무료봉사를 해준 우리 교포의사 토머스 민박사가 남편의 유일한 주치의였다. 남편은 자신의 건강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사가 최고라고 는 자랑했다.

      

    나도 19705월 아주 귀국해서 중앙의료원 치과과장이던 최상열 박사를 찾아가 의치를 만들었는데 18년이상 썼는데도 탈 한번 없이 편안하게 이 국산 틀니가 내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지금 하나로빌딩에 있는 윤내과의 윤해병박사가 나의 건강상담을 해주며 보살펴 주고있다. 이렇게 편하고 행복하게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지내는 여생이, 고생만 하다 하와이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면 내겐 과분하게만 느껴진다.

     

     

  8. 8. 치아 좋은건 김치 덕

    내용

    지난 326일은 남편 리승만박사의113회 생신날이다.

    남편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한학자이셨던 아버님 이경선공과 당시 여자로는 드물게 학문을 익히고 이씨 가문에 시집오셨던 어머님 김해 김씨 사이에서 1875326일에 태어났다.

    이 해는 고종 12년으로서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하여 포격과 약탈로서 우리나라를 유린하던 해였다.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에는 위로 딸이 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후에 마마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님은 자꾸 나이가 드시니 걱정이 많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님이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당신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나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은 남편의 아명을 승룡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어렸을 때 생일이 돌아오면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미타사나 북한산 꼭대기에 있는 문수사라는 절을 찾아사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당시 한국여성들이 그랬듯이 불교신자였던 시어머님은 생일날이 되면 그 험한 산길을 어린 아들과 함께 걸어 올라가서 생일불공을 드렸던 것이다. 감옥생활 일곱해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남편은 어린시절 어머님을 따라 절을 찾아다녔던 즐거운 추억을 얘기하고 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돌아오 대통령이 생신을 맞았을 때 문수사에서는 튀각을 보내왔었고 옥수동의 미타사에서는 나이 많은 여승이 누룽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치아가 좋았던 대통령은 누룽지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경무대에서 요리사 양노인은 가끔 대통령의 간식으로 누룽지를 써비스하여 대통령을 기쁘게 해 주었다. 80세가 넘은 후에도 그 딱딱한 누룽지를 맛있게 드는 대통령의 치아는 음식솜씨 좋으셨던 어머님이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대통령은 늘 자랑하였다. 소금에 절인 김치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한국인의 치아는 세계 어느나라 사람의 치아보다도 충치가 없고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하야 후 하와이에서 요양할 때 의사가 김치는 짜기 때문에 고혈압에 해롭다고해서 김치를 조금씩 드렸더니 남편은 나에게 [김치가 건강에 나쁠게 뭐람. 나같은 한국인은 김치를 못먹으면 혈압이 더 오른단 말이야]하고 투정을 했다. 경무대에서 대통령은 어려서 먹던 어디.머루.다래.칡뿌리..메뚜기볶음 같은 음식을 가끔 찾기도 했다.

      

    대통령은 옛날 고향에서 먹던 된장떡과 비지찌개를 만들어 달라고해서 정성껏 만들어 드리면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아니야!]하면서도 맛있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어린시절 대통령을 가장 즐겁게 해 주던 간식은 어머니가 바느질 하시며 화로속에 인두를 꽂으신채 구어주신 군밤이었다. 삯바느질까지 하셨던 어머님은 직접 어린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서 이미 여섯살 때 남편은 천자를 모두 외웠다고 한다. 그당시 얼마나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지 부모님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바로 그해에 천연두가 돌아서 남편도 여섯살 때 마마를 앓았다. 마마를 앓고난 끝에 눈이 안보여서 부모님은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진고개에 있던 외국인 의사의 치료를 바도 나았다고 한다. 그 당시 외국 사람이라면 무조건 불신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처음에는 외국인 의사에게 가는 것을 몹시 꺼렸으나 워낙 6대독자의 눈병이 큰 걱정이어서 할 수 없이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남편은 하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소독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리며 [왜내 난다 가자!]고 졸랐다고 한다. 이것은 남편이 난생 처음으로 맡아본 신문명의 냄새였다. 의사는 남편의 눈에 물약 몇방울을 떨어뜨리며 [사흘이면 나을테니 염려말라]고 장담했다. 의사의 말대로 3일간 눈에 약을 넣고도 별 효험이 없는것 같았으나 나흘째 되던 생일날 아침 의사말대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아침에 의관을 갖추고 앉으셔서 고문진보의 출사표를 읽고 계시다가 [아버지, 자리굽이 보여요!]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시고 깜짝놀라 [정말로 보이느냐?]하시며 책상 위의 억을 집어들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니 []이라고 똑똑히 대답했다. 부엌에서 생일상을 보고있던 어머니를 향해 [승룡이가 눈이 보인다오]하고 큰 소리로 알리셨다. 어머니도 반가와서 얼결에 신발을 벗어들고 [이게 뭐냐?]고 물으니 [어머니 신발]이라고 대답하자 너무 기뻐 아들을 얼싸안고 우셨다. 

    너무나 기뻐서 아침먹는 것조차 잊으시고 달걀 두 구러미를 감사의 뜻으로 전고개 의사에게 보내셨다. 그런데 아드님에게 더 필요하다고 돌려보내와서 그것으로 전을 부치고하여 이웃사람들을 청해 조그만 생일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남편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맨먼저 일가분들에게 [옛날 혜랑벼슬을 지내셨던 이호선씨의 후손이 조치원에 살고 있다]고 당시의 양녕대군파 도유사였던 친척 이병규씨가 말씀드리자 무척 기뻐하며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병규씨가 대통령 생신날 호선씨의 손자가 되는 회수씨의 부인 연안김씨를 데리고 경무대로 찾아왔었다. 병규씨가 [이 아주머니가 혜량대부의 손부입니다.]하고 소개하였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퍽 반가와하며 [~, 그래 안죽고 돌아오니 다 만나보는구먼, 내가 그렇게 보고싶어 했는데..., 그래 애들은 뭘하고 있어]하고 묻고는 [내가 여섯살 먹어서 눈을 못봤어. 그때 아버지께서는 자주 혜량댁에 가셨는데 그 어른의 주선으로 병원에 가서 내눈이 괜찮았어. 그때 눈이 멀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없을것이 아니오]하며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가난한 때라도 어머님께서는 아들의 생일날 미역국과 흰쌀밥을 해주셨고 수수팥잔지와 튀각을 해 주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해외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 할 때는 생신날 굶은 적도 있었다. 그당시 남편은 배가 몹시 고프면 뉴욕의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일하고 고학하며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최용진씨를 찾아가 요기를 하곤 했었다. 때로는 이분과 함께 두그릇의 울면만 식탕위에 놓고 생신파티를 하며 고향집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나와 결혼한 뒤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통령의 생신날에는 미역국과 흰쌀밥을 해드렸고 물김치나 깍두기와 함께 잡채와 불고기같은 맛있는 한국음식을 꼭 해드렸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생일축하행사를 사양하겠다고 하며 친구나 친척들만 경무대로 초대하여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남편은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내가 [기왕 축하행사를 준비했고 특히 축하행사 연습을 한 어린이들을 실망시키게 된다]고 말하니 [나도 어려서 어른 생신잔치에 가는 것이 즐거웠어. 내 생일날 어린이들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해야지]하고 승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생신날 중에서 나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날을 부산임시관저에서 맞은 1951년의 생신날이다. 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가지도 더 생신음식을 장만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 당시 많은 전재민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날마다 처참한 부상병들이 신음하며 후송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생신선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엄금하며 일체 사절한다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생신음식 조차 가져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부산임시관저에서 살다가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겼던 양성봉지사 부인이 인절미 한 둥구미를 가져 왔었다. 양지사 부인이 대통령께 인절미를 선물해 온데는 사연이 있었다. 


    얼마 전 대통령과 양지사가 배를 타고 거제도를 비롯하여 남해안의 여러곳을 시찰차 순회했었다. 이때 양지사는 인절미를 가지고 와서 대통령과 배안에 탄 모든 일행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어찌나 그 떡이 맛이 있었는지 한참후에 양지사를 부르더니 [양지사, 아까 그 인절미 참 맛있던데, 그떡 정말 맛있어]하며 넌지시 양지사에게 남은 떡이 있으면 조금 더 내놓으라는 눈치를 보였었다.

    그러나 남은 떡은 하나도 없었다. 

    대통령은 조금 실망하는 눈치여서 양지사는 마음속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신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말라는 엄명이 있었지만 인절미만은 대통령께 드려도 별 탈이 없을 것으로 알고 가져왔다는 것이다. 과연 대통령은 인절미를 보자 하도 맛있게 많이 들어 나는 걱정이 되어 마침내 그 인절미를 감추어 버려야만 했었다. 



  9. 9. 식사 땐 말 없이

    내용

    대통령은 음식을 가려먹는 식성이 아니고 건강했기 때문에 보약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보약이란 허략한 체질의 소유자나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지 자기처럼 건강한 사람에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인삼같은 선물을 받게되면 늘 이덕제라는 어렸을 때 친구에게 보내곤 했다.

    심지어 1.4후퇴 직전의 성탄절에 대통령의 종가댁 종손이며 서당친구였던 이병주씨가 가져온 인삼까지도 대통령은 덕제씨에게 보내었다. 그 어려운 전시에도 불구하고 병주씨는 대통령이 어려서부터 좋아했다는 약과와 마르지않은 임삼 세뿌리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경무대를 찾아왔었다. 대통령은 인삼 세뿌리를 모두 다시 종이에 싸들고 병주씨에게 [이 인삼은 덕제를 주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대통령을 특별히 생각해서 가져온 인삼을 덕제에게 주어야겠다는 말이 병주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할까봐 대통령은 우유와 인삼이 맞지않는 체질이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설명을 했다.

    대통령이 이와같이 덕제씨에게 인삼을 보내게 된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이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왔을 때 어린시절 서당친구로서 살아 있었던 병주씨와 덕제씨 오직 두사람 뿐이었다. 

    장난이 심했던 철없는 시절, 대통령은 이웃친구 덕제와 함께 어른들의 담배쌈지에서 담배를 몰래 집어내고 골통대를 만들어 둘이 앉아서 한 없이 빨았었다. 그러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저녁상을 받는 자리에서 구토가 시작되어 담배냄새가 나자 어른들이 사정을 알게되어 호되게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후 대통령은 일생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일찌감치 담배 피우기를 졸업해 버린 셈이 되었다. 

    일곱살 때 덕제와 함께 자다가 덕제가 대통령의 이부자리에 실례를 한적이 있는데 대통령의 어머니는 두 개구장이 글방도령에게 함께 키를 씌워서 소금을 얻어오도록 종가댁의 정경부인에게 보내어 둘이 함께 혼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에 돌아온 대통령은 덕제씨를 만나게되어 무척 반가와했고 오랫동안 헤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건국 후 덕제씨가 경무대로 찾아와 늘그막에 사삼이나 억어먹게 고성군수 한자리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대통령은 그의 청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인삼만 보면 덕제씨에게 보냈지만 고성군수가 되고 싶었던 덕제씨는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몹시 섭섭해 했다고 한다. 그 후 대통령은 덕제씨의 아들을 경찰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한 후 경찰관으로 채용했다. 

    언젠가 강원도의 어느 노인이 대통령에게 산삼을 선사했을 때도 대통령은 덕제씨에게 보낼 좋은 선물이 생겼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요리사 양노인이 산삼은 참으로 귀한 것이고 예로부터 영약으로 알려진 것이니 조금만 달여서 대통령에게 드려보자고 나에게 제안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이 덕제씨에게 보내기로하던 산삼의 한쪽을 떼어내어 대추와 생각을 넣고 함께 달였다. 

      

    그러나 인삼은 좋은 보약이지만 체질에 맞지않으면 오히려 해롭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 나는 그것을 대통령에게 드리기 전에 먼저 마셔보았다. 그런데 곧 눈인 충혈되면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게되고 심한 두통이 났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을 대통령에게 권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후 사람의 체질을 분류하여 한약을 짓는다는 이른바 사상의학설에 의하면 대통령은 태음인이고 나는 소양인이 되어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인삼이 맞지않는 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대통령에게 보약을 권한 일이 일체 없었다. 산삼이 얼마나 몸에 좋은지는 모르지만 덕제씨는 대통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보약을 들지 않았던 대통령이 더 건강하게 장수하였다.

      

    한국 전쟁 중 전투가 치열했던 동해안을 시찰하고 장병들을 위문하러 갔을 때 설악산 장수대에서 대통령이 묵게되었는데 백인엽장군과 오덕준장군에게 [산에서 내려오는 물속에 진짜 산삼녹용이 다 녹아 있다]고 하면서 [산삼이 좋다면 나같은 늙은이보다는 싸우는 장병들이 먹어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러 우리나라로 동자들을 보냈는데 하도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가 좋아서 모두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대통령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불로초가 한국의 인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나는 인삼을 아무에게나 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불로초를 든 적도 없이 80세가 넘어도 젊은이처럼 건강했던 대통령은 남달리 부지런하고 낙천적인 성품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때라도 한국인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사람들을 웃기고 위로해 주는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건강장수의 비결은 허욕없이 편안한 마음가짐과 절도있고 규칙적인 생활습관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만 한국음식을 남달리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이 특별히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들때는 과식하는 일이 없도록 늘 옆에서 감시해야만 했었다. 과식보다는 소식이 정신을 더 맑게하며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거북이나 학.사슴 등과 같은 십장생동물들은 한결같이 소식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대통령은 식사할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어렸을때 부터 대통령은 식사할때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의 어머니는 식사할때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일러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6대독자인 아들에게 [콩한조각도 사이좋게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줄 알아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시며 [나누어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다름없다]고 가르치셨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대화를 즐기면서 식사를 해온 나는 말없이 식사만 하는 대통령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될 때가 많았다그러나 대통령은 독립운동하던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시나 한결같이 자신의 독특한 한국식 식사매너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특히 외국귀빈을 경무대로 초대하여 식사대접을 할 경우는 식사 도중엔 말을 하지않는 대통령이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나는 늘 각별한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유명한 한국식 식사매너를 이미 알고 오는 외국귀빈들이 많아서 별 문제는 없었다. 경무대에서 외국귀빈을 접대할때는 콩나물잡채와 닭찜을 주로 했었는데 닭찜에는 꼭 죽순을 넣었다. 이밖에도 밤..은행.표고.대추 등 한국의 맛과 멋을 살린 이 닭고기요리를 우리는 미화된 닭고기 즉 영어로 표현해서 Glorified Chicken이라고 불렀다. 콩나물잡채와 닭찜은 늘 외국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비싼 쇠고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썼고 불고기.신선로.구절판같은 특별메뉴도 가끔 선보였었다.

      

    90평생을 그토록 정력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남편의 건강은 아들에 대한 정성이 남 달리 지극하셨던 어머님 덕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병장수의 첫째 조건인 모유를 먹으며 대통령은 어머니 품에서 자랐다. 어머니 젖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훌륭한 건강식이기 때문에 영국의 여왕도 자녀들을 모유로 기른다고 한다. 또한 7년간의 옥중생활에서 갖가지 괴질 전염병과 혹독한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남편의 강한 투지와 집념 그리고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는 실정이었다. 늘 자신의 건강보다도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시절 대통령은 도토리묵이나 메밀묵, 콩가루 넣은 주먹밥.칼국수.동치미.냉면같은 어머님의 정성이 담긴 한국음식들을 먹으며 힘껏 뛰어놀며 자랐다. 

      

    부산임시관저로 피난을 갔을때 대통령은 정원의 돌틈에 나있는 반풍나물을 보고 [양지사, 저 반풍나물은 몸에 아주 좋은 것이야. 저 귀한 나물은 양지사 아들이 먹어야 해]하면서 삽으로 떠내서 양성봉지사의 새 거처로 옮기게 하였다. 양지사 부인이 반풍나물을 대통령에게 가지고 올 때마다 대통령은 [나같은 늙은이보다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먹이셔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

    대통령은 미국에서 독립운동할때 9살 먹은 외아들 태산이를 전염병으로 잃고 슬픔과 한을 늘 가슴속에 깊이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에 양지사의 외아들에게도 남달리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 



  10. 10. 돈 안드는 장수 비결

    내용

    [리대통령은 90세를 넘도록 사셨으니 천수를 다하였다]고 하지만 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150세까지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현대인을 위해 에드워드 보워츠박사가 제시한 돈 안드는 장수 비결 10가지를 보면 대통령의 생활습관과 비슷한 것이 많아서 적어본다.

      

    첫째는 균형있는 식사를 한 것이다. 과일.채소 등 자연식품을 골고루 균형있게 먹으면 건강장수에 필수적인 영양소와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다. 특히 주의할 것은 과식을 피해야 한다. 12년간의 대통령 재직 시를 포함해서 남편의 주머니는 늘 가벼웠고 또 여유가 있을 때라도 대통령은 비싼 고기류를 못사오게 해서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모든 성인병이 자동적으로 예방되었고 아내인 나도 덕을 보게 된것 같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40여년 동안 남편은 고생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먹을것은 물론 옷까지도 나누어 입어야 했다. 신혼시절 대통령이 그토록 아껴입는 양복 바지들이 눈에 거슬리게 늘였다 줄였다한 흔적이 너무 많아서 나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어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남편은 [동포 노총각들을 성공적으로 결혼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흔적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나라를 잃은 후 하와이나 미주에 노동이민을 온 많은 동포총각들이 백인들의 사탕수수농장이나 공사장에서 흑인노예처럼 고생하면서 노동을 했었다. 그중에서도 건강하고 성실한 동포총각들이 나라를 찾기위해 독립자금을 내면서 돈을 모아 고국에서 처녀를 데려다 결혼할 정도가 되려면 50을 바라보는 총각까지 있었다. 사진만 보고 젊은 신랑으로 생각되어 물건너온 고국의 어린 신부들은 사진과는 달리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기절을 할 정도였다. 

    사진결혼에 얽힌 애환이 수없이 많던 시절에 리승만 박사의 양복과 바지는 특히 늙은 신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리박사의 양복이나 바지를 빌어입고 결혼할 색시를 마중나가면 성공한다는 미신을 믿는 늙은 신랑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나와 결혼한 뒤에는 모두들 생활의 여유가 생겼는지 남편의 옷을 빌리러 오는 노총각들이 드물었다. 

      

    나이 많은 신랑과 어린 신부들이 결혼해서 잘사는 경우도 많았지만 어린 신부들이 집을 뛰쳐 나오거나 도저히 융합이 안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이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신부들을 자기가 가르치는 하와이기독학원의 기숙사에 유숙시켜 교육하고 또 신랑도 교육을 해서 다시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예도 있었다. 하와이부인구제회의 중추역할을 하며 6.25 당시 우리나라의 전재민들을 위해 맹활약을 한 정순예.김여사도 기독학원의 교육을 받은 어린 신부중의 하나였다. 정순예.김여사는 작년에도 한국을 다녀갔으며 여러 자녀와 함께 호놀룰루의 영 스트리트에서 지금도 유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고국의 처녀를 데려다가 결혼한 노총각들은 참으로 행운아들이었다. 미국으로 노동이민을 간 많은 노총각들은 처녀 손한번 잡아보지 못한채 타국에서 일생동안 노동하면서 고국산천과 가족들을 애타게 그리다가 끝내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이토록 외롭게 일생을 마친 노총각들 중에는 고국에서 신부를 데려올 것을 목표로 알뜰히 모으고있던 돈을 대통령에게 맡기면서 우리나라를 찾는데 꼭 써달라고 부탁하며 대통령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은 해외에서 독립운동할 때 참으로 어렵고 고달플때가 많았지만 이런 이름없는 애국자들의 장례를 치를때마다 각오를 다지며 힘을 냈었다. 

      

    앞서 알렸던 보이츠박사의 돈 안드는 장수비결의 두번째는 몸의 내부와 외부를 항상 깨끗이 유지하는 것이다. 바깥 공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목욕을 자주해야 한다. 그리고 체내의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맑은 공기를 심호흡으로 깊이 마셔 몸안의 불필요한 가스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통령은 늘 틈만 나면 전지가위를 들고 뜩에 나가서 나무를 손질하는 것이 취미였고 나무를 무척 사랑했었다. 대통령은 어찌나 나무를 사랑했던지 죄없는 나무가 잘리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받은 후 미국인들이 격분하여 워싱턴 포토맥강변의 벚꽃들을 모두 베어버리려 할 때였다. 대통령은 그 벚꽃들의 원산지가 한국의 제주도와 울릉도이며 고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화를 전해주고 지도층으로 군림했던 한국인들이 일본의 고도 [나라]에다 심었다는 역사적 이야기를 말해 벚꽃구명 캠페인을 벌이며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에는 대통령이 그때 심은 벚꽃나무 네그루가 크게 자라서 그 유래와 함께 뜻을 기리기 위해 아메리칸 대학측과 선윤경 목사를 중심으로한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코리언 가든]을 만들고자 노력중이며 재작년 4월에는 이 대학의 한국학생들이 모금하여 기념비를 세웠었다. 

      

    셋째는 항상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이다. 휴식과 수면은 사람의 건강유지에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이나 육체의 피로는 만병의 근원이 된다.

      

    넷째 운동은 나이를 먹을수록 필요한 건강의 조건이며 중년기부터는 뛰는 것보다 적당하게 걷는 운동이 장수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대통령은 저녁식사를 하기전에 틈을 내어 경무대 뒷산을 나와 함께 산책하며 오르내리기를 즐겨했다. 남편은 대통령이 된 후 경호경관들이 경호해 주는 것을 무척 부담스럽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옛날에는 순검들이 나를 잡으러 따라 다녔는데 지금은 경호를 해준다고 따라다니니 감개무량하다]고 말하면서도 부자유스럽게 느꼈다. 한번은 대통령이 나와 함께 경무대 뒷산에 올라가는데 경호관 이선영 경사가 우리 뒤를 열심히 따라왔다. 

    대통령은 나에게 이경사를 떼어버리자는 신호를 보내어 둘이서 함께 부지런히 올라가면 눈치채고 돌아갈 줄 알고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으나 이경사는 우리를 놓칠헤라 더 빨리 따라왔다. 그러자 대통령은 넌지시 이경사에세 [이사람아, 여기는 공산당이 없는데야. 이경사는 연애도 안해봤나]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다섯째는 웃음을 잃지말고 살 것이다. 인간이 노쇠하는 큰 원인의 하나는 긴장과 스트레스이다. 바로 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이 웃음이며 유머 감각이다. 대통령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잘 웃고 남을 웃기는 유머가 풍부했으며 늘 마음에도 여유가 있었다.

      

    여섯째는 질투와 노여움.증오감을 갖지 말 것이다. 질투.분노.증오심 등은 건강에 가장 해로운 독소이다. 화내고 비관하고 불안해 하는 것과 특히 남을 미워하는 것이 가장 빨리 사람을 늙게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고 늘 편안한 마음으로 대자연을 자기의 집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세상을 살면 늙지 않는다고 남편은 말했다.

    대통령은 자기를 모함하고 중상하는 자들에게 늘 관대했고 이에 개의치 않았으며 항상 용서하고 잊어버리도록 나에게도 타일러 주었다. 

      

    일곱째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적극적이며 진취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장수한다고 한다. 진취적이고 활기에 찬 사람들과 사귀면 스스로 젊어진다고 한다. 대통령은 한국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때 가장 사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는데 자신도 늘 어린이나 젊은이 처럼 순수한 데가 있었다.

      

    여덟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 늘 젊게 살수가 있다고 한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대통령은 [독립미치광이 노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한국인에게 시집온 나에게도 한국인의 아내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홉째는 대중적인 공공사업에 봉사할 것이다. 자기의 젊음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면 사회적인 활동에 과감하게 뛰어들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생명의 호흡이 있고 젊음의 활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웃과 동포를 위해 쉴새없이 봉사해온 대통령은 늘 건강했고 젊은이처럼 활기에 차 있었다.

      

    열번째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것이다. 언제나 인생에서 배우는 자세와 함께 새로운 지식을 향한 탐구심을 불태워야 한다. 인간에게는 자연이 준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능력을 개발하고 힘껏 노력하는 자세에서 젊음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한다. 대통령은 80이 넘은 후에도 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했고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다 써가지고 다니며 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대통령의 장수비결은 우리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쉬지않고 일하며 노력한데 있었다. 통일만 되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한가한 시인 우남선생으로 죽장에 삿갓쓰고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을 유람하겠다고 하던 남편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된채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데 진정한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늘 남편은 말했다. 

    하와이의 병실에서 멀리 조국강산을 그리면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고 하던 남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다. 

     

     

     

  11. 11. 옥고 이겨낸 구국일념

    내용

    지난번 나는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젼을 통해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처음부터 끝가지 재미있게 보았다. 천하장사 이만기장사와 이준희장사의 멋진 승부를 보면서 남편이 자랑하던 대로 역시 한국의 씨름이야 말로 문화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경기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서로 존중하면서 신사적으로 힘과 기를 겨루는 참으로 멋진 모습이었다.

      

    가끔 마당에서 우리 손자들이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씨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대견해하고 기뻐하실까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본다. 어려서 부터 씨름.연날리기.썰매타기.사방치기.술래잡기.숨바꼭질 등등 안해본 놀이가 없었던 대통령은 심지어 남사당패들을 따라가 광대놀음까지 즐겨 구경했는데 그 때문에 엄한 부모님에게 꾸중도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 우리가 마포장에서 살때 남편은 시인 서정주씨에게 자기의 어린시절얘기를 들려주며 [사당패 돈이야!]하고 흥을 돋구는 남사당놀이 흉내까지 내면서 열심히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남사당놀이는 퍽 재미있었지. 그 남사당패들은 퍽 행복했을거야!]하며 남편은 사뭇 감탄조로 얘기해 주었다.

      

    하와이에서 동포 어린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독립운동하던 시절 대통령은 애들에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놀이부터 가르쳤다. 하와이섬의 숲과 들에서 홀라춤을 추며 원주민에게 동화되어가는 어린 동포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대통령은 동포 어린이들을 한국기독학원으로 모아들였다.

    대통령은 골목대장처럼 어린 동포들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개구장이 꼬마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꼬마들을 불러모아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나 숨바꼭질을 할때면 재미있는 우리말로 어린 동포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대통령은 술래노릇도 했다. 동포 어린이들과 함께 뛰어놀 때는 어른이 어린애처럼 잘 어울렸다. 

    우리나라 체육발전과 올림픽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던 정.월터 선생도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대통령으로 부터 연날리기와 씨름과 제기차기같은 놀이를 배웠던 꼬마선수였다. 동포 어린이들은 대통령만 보면 [흥부와 놀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같은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서 매달렸다. 특히 김치할머니로 알려지고 한국에 자주와서 좋은 일을 했던 유헤나여사도 어렸을 때 하와이에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가장 많이 졸라댔던 학생이었다.

    여자 어린이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지키기위해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푸른 강물에 몸을 던졌던 3천 궁녀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다고 한다.그리하여 유헤나여사는 한국에 오면 꼭 낙화암을 찾았다. 

      

    대통령은 남자 어린이들과 팔씨름을 자주 했는데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마지막 역전승을 시켜주어 사기를 올려주었다. 사실 대통령은 팔힘이 굉장히 센 편이었다. 청년시절부터 줄곧 장작을 패고 목수일을 즐기며 나무를 손수 가꾸고 전지해 주는 등 팔운동을 쉬지않고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팔힘뿐만 아니라 기운이 좋아서 붓글씨를 하루종일 연습해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악수를 많이 해야했던 은사인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은 손을 건사라는 법을 배워서 나에게도 가르쳐주고 김활란박사나 임영신여사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더운 때는 손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려 땀이 나지않게 하고 추운 때는 엄지손가락을 주먹안에 넣어 꼭 쥐고 있으면 손이 차지않았다. 이것은 상대방과 악수할때를 생각해서였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손과 발을 잘 위해 주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대통령의 손은 온갖 일을 가리지않고 그토록 열심히 일 하는데도 유난히 부드러웠 다. 다만 몹시 화가 나면 손끝을 후후 불어대는 습관이 있었는데 서소문의 흙 감방에서 손끝마다 대나무에 꽂혀 고문받던 때의 고통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끼니마다 잡곡으로 된 주먹밥 한 덩어리와 콩나물국만 먹으며 7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괴로왔던 일은 여러가지 잔인한 형벌을 받은 뒤 살인범과 중죄수만 가두는 흙바닥 감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손발에 족쇄를 채웠고 목에는 칼까지 쓴 채 살인강도들과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사형당할 날이 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어두운 흙바닥 감방은 비내리는 날엔 심한 습기를 견디기 어려웠고 석양이나 새벽이면 죄수들은 통곡을 하였다. 

    [선생님, 나 같은 것은 죽으면 지옥에나 가겠습죠?]하고 묻는 사형수가 있었고 밖에서 덜커덕 문여는 소리가 나면 [선생님, 이제는 내차례지요?]하면서 대통령에게 매달려 비지땀을 흘렸다. 같은 사형수의 처지였지만 대통령은 그들을 편안하게 위로하려고 정성을 다했다.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남편은 재임시 감옥의 죄수들에게 남다를 관심을 보였고 사형서류에 도장찍는 일을 제일 꺼리고 싫어했다. 조용히 죽을 각오를 하고 있을 때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의지할 곳 없는 늙은 아버지와 처자식 그리고 동지들과 헐벗고 몽매한 동포들의 일이었다.대통령은 자신이 그토록 고생하는 감옥게 갇히기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다.

      

    어느 날 아침 같은 감방의 늙은 죄수가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가 신문을 들여왔는데 채규상이라는 분이 쓴 글에 [죄수 리승만은 이 나라에서 누구보다 애국자이니 그를 죽이려거든 나를 대신 죽게해 달라]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이토록 자기를 동정하는 알 수 없는 벗의 정의에 감동되어 대통령은 북맏치는 설음에 잠겨 소리없이 울었다.

      

    그런데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승만아]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내 자식의 시체를 어서 주시오! 어젯밤에 처형됐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어서 내놓으시오.] 아들이 처형당했다는 오보를 듣고 옥리에게 사정하는 늙은 아버지의 비통한 음성을 들으며 대통령은 그만 가슴이 내려앉아 칼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 늙은이가 돌았나? 처형은 무슨 처형이요? 당신 아들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 염려말고 어서 가시오!]하고 옥리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버지]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아버지!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 안심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어!]하고 외쳤다. 그러자 밖에서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는데 덜커덕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 뒤에도 가족들이 찾아와서 담밖에서 목메이게 부르는 음성이 아픈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 때로는 면회도 허용되었다. 머지않아 처형될 몸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대통령은 어차피 죽을 바엔 빨리 죽여주었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심정이었다. [제발 천주학은 하지말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통령은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오 하나님!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고 내 영혼을 구해 주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대로 대통령은 자신의 나라와 영혼을 구하기 위해 고난의 일생을 살고 갔다. 형장으로 끌려갈 날 만을 기다리면서 대통령은 아버님께 올리는 유서를 썼다. [불효한 자식하나 안두신 셈 치시고 부디 잊으시옵소서] 이렇게 써서 교수대로 나갈때 옆사람에게 주어 전하도록 몰래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해질 무렵 감방문이 열리며 형리가 나타났다.


    [이제는 틀림없이 내차례로구나!]하고 재빨리 옆사람에게 유서를 전한 다음 무심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형장으로 끌려간 사람은 유서를 받아지닌 늘 저승길을 걱정하던 강도였다. 그토록 자기를 의지하며 뉘우치던 강도가 그 유서를 지닌채 처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은 같은 감방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지들이나 죄수들과 헤어질때가 퍽 괴롭고 고통스런 순간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같은 사형수의 처지에 있는 대통령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듯 대통령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끌려갔는데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쳐 주는 것이 위로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무거운 칼소리가 들려올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존경했던 장호익장군도 자기의 감방 뒤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는 세번째 칼소리가 날때가지 계속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애국자 장호익장군의 죽음을 대통령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7개월 동안 칼을 쓰고 사형수 감방에 있다가 유기수 감방으로 옮겨진 대통령은 그후 감옥의 애국동지들과 함께 죄수들에게 공부도 가르쳤고 감옥 안에 도서관을 설치할 때는 목수일을 했었다. 감옥에 콜레라가 돌아 4~5일 동안에 60여명이 옆에서 죽어갈 때는 밤을 새며 환자들을 돌보고 위로해 주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죽어가는 사람과 호흡을 함께 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주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지만 홀로 건강을 잃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역시 본인의 의지와 하나님의 가호라고 생각된다.

     

    대통령은 사형수의 형틀을 쓰고 있을 때도 두눈을 지그시 감고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공부를 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쓰나?]하고 옆에서 물으면 [죽으면 못쓰더라도 산 동안은 할건 해보아야지.... 혹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하고 태연히 대답하며 영한사전을 집필했으니 고생스런 감옥에서도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어 심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질 때 사람은 노력을 하게 되고 마음과 몸의 건강도 지켜지기 마련인가보다.


     

  12. 12. 백 아들 천 손자 거느리고 파

    내용

    노인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일했던 대통령은 국군이나 유엔군 장성들을 대동하고 일선시찰도 자주 다녔다. 그 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못하여 비행기나 헬리콥터 안에서 악천후를 만나면 기체가 몹시 흔들렸다. 그럴때는 동행했던 건장한 장군들도 견디기가 힘들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였는데 제일 나이 많은 대통령만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버티고 있었다. 곁에서 몹시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통령은 어린시절의 즐거운 추억같은 것을 생각하면 고통이 덜어질 것이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토록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대통령이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달리 위장이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20대 청년시절 부터 구국운동에 투신했던 대통령은 감옥살이 할때만 끼니를 거르지 않았을뿐 미국에서 고학하며 독립운동을 할때는 사과 1개로 하루를 지내며 배고픔을 견디는 때도 있었다. 배가 몹시 고플때는 냉수를 마시면 고통이 덜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시에도 경무대에서 더울때면 쥬스보다도 냉수를 즐겼다. 언제나 산책이나 운동이 끝나면 대통령은 냉수 한컵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고 시장할때면 으례 냉수부터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냉수를 들었고 감기가 들면 백비탕(맹물 끓인것)을 계속 마시고 거뜬히 일어났다. 이렇게 대통령은 튼튼한 위장을 타고 났지만 냉수를 마시는 습관이 위장을 더 튼튼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미국의 많은 교회와 학교의 집회에서 한국을 소개하고 일본의 학정 밑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학비를 보조받고 독립운동도 했다. 특히 조지워싱턴대학 재학중엔 생계가 어려워서 늘 굶주려 쇠약해진 몸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쳐 힘이 없을 때라도 일단 연단위에만 올라서면 어디서 힘과 열정이 솟는지 한국인 특유의 흥미롭고 박력있는 연설로 청중을 매료하여 감동시키고 끝날때는 늘 박수갈채를 받거나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1907613일 위싱턴포스트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기사에서 [리승만씨는 한국과 그 국민의 풍습에 관해서 100가지 이상의 흥미있는 얘기를 했다. 그는 한국의 양반계급 부인들은 외출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일 수가 없다고 설명하여 폭소를 자아냈다. 그대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채 외출이 허용되고 있는 중류계급 부인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수백명의 청중이 이 강연에 참석하였다. 이 젊은 한국청년은 폐회할때 열련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썼다.

      

    대통령은 그당시 과로와 영양실조로 건강과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을 못할줄 알았는데 조지워싱턴대학의 학사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졸업식에 있어 이 젊은 한국청년보다 더 열렬한 박수를 받은 학생을 없다]고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방주간란에 보도를 하였다. 대학성적이 A학점이상은 서양사뿐이었고 그 이외의 과목은 BC학점이었고 수학은 동정점수인 D학점이었는데 서당에서 산수 공부를 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늘 숫자난 계산으로 따지고 드는 편이 아니었지만 친지들의 자녀수와 경무대 직원들의 자녀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녀들이 많은 사람을 늘 부러워했고 생신때나 성탄절에도 특별히 더 많은 선물을 주었다.

      

    1.4후퇴때 민정시찰을 나간 대통령은 부산역 근방에서 얼굴과 코는 거무스럼하게 그을렸으나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어느 피난민 부부와 그들의 8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함께 어린애들을 업거나 보따리를 메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헤어졌거나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신문광고가 지면에 가득한 때여서 모든 식구가 아무탈 없이 무사히 부산까지 올 수 있었던 행운의 가족으로 보였다. 대통령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 아버지에게 묻자 구포에 사는 사촌 형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며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린 채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올망졸망 따라가고 있는 8명의 어린애들을 보며 나는 아무리 사촌형이라고는 하지만 저 많은 애들까지 환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이 되어 전시에는 많은 자녀들을 가진 부모님들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하면서 [참으로 그는 자식복이 많은 행운아야!]하며 부러운듯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온가족이 헤어지지않고 한데 모인 그 가족처럼 다른 가족들도 다함께 모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6대독자이고 젊은 날 옥중에서 [빈대]라는 시를 지은일이 있는 대통령은 남달리 자녀 많은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빈대>

      

    따뜻하면 기운펴고 차면 오무려

     

    천정으로 바닥으로 오르내리네

     

    하얀 벽을 돌고 돌아 아롱을 찌고

     

    마루 틈을 헐어보면 몰리어 있네

     

    모기와는 연이 멀어 혼인 안되고

     

    벼룩이나 이 쯤은 곁방사릴세

     

    네집은 어쩌다 복많이 받아 백아들 천손자 대를 잇느냐.

     

      

     

    부산 피난 당시 대통령은 나에게 [지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장병들은 모두가 우리의 아들들이야, 당신은 걱정해야할 아들들이 많아]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왜 그토록 대통령이 아들을 원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28년이나 되는 긴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늙은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아 들 인수와 며느리 혜자 그리고 큰 손자 병구, 작은 손자 병조와 함께 남편의 산소에 성묘갈때면 참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천상의 대통령도 우리 식구들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환영하고 반기실 것인가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어서 천상의 대통령 곁으로 가야할 나이지만 속으로는 손자 며느리까지 보고싶은 욕심이 생겨서 남이 알까봐 두렵다.

      

    4월이 되면, 생각하면 할수록 불쌍하고 가엾게 자살했던 양자 강석이와 만송의 가족들이 생각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내색을 안했다. 어떻든 젊은 애들을 먼저 구하고 죽어야할 우리가 살아남게 되자 남모르는 마음속의 고통과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23일 대통령이 4.19부상학생들을 찾아서 서울대학병원 병실에 들어섰을 때 부상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 안 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대통령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같은 늙은것이 맞았어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죄없는 애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자기를 벌해 주시라고 기도하며 오직 나라를 위하는 길로 이끌어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은 이미 벌써부터 서 있었다.

      

    그러나, 하야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대통령은 그토록 정을 쏟으며 사랑했던 양자 강석이가 경무대 안에서 자기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함께 자결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얼마나 노인의 슬픔과 충격이 크고 깊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때 하야직후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야겠다고 버티던 대통령을 억지로 차에 태웠던 일들이 꿈과 같이 느껴진다. 세월이 모든 것을 잊게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듯 아플때가 있다.

      

    강석이를 양자로 맞은 후에 한 식구가 늘게되자 우리는 웃을 일이 더 생겼고 대통령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그애가 오면 함께 먹을테니 아껴두라고 늘 부탁했다. 식탁에서도 이것저것 권해서 잘 먹는 것을 보면 어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대통령은 무척 기뻐하고 대견해 했다. 그애가 현관문에 들어서면 반기면서 빨리 먹을것을 챙겨오라고 재촉하거나 어쩌다 목욕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면 등을 밀어 주겠노라고 목욕탕문을 두드리며 장난을 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람의 정이 무엇인지 그토록 정을 쏟았던 아들의 자결 소식은 많은 나이와 함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간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대통령은 실어증까지 겹쳐 그 유창한 영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13. 13. 따뜻한 온돌방이 좋아

    내용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후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걸어갈 뜻을 결심하자 나는 경황 중에도 대통령이 경무대 뒷산을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찬장 서랍을 열고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과 반쯤 남은 작은 찻병을 핸드백에다 챙겨 넣고 따라나섰다. 이 차는 밀 껍질과 호밀의 겨를 함께 까맣게 볶아서 빻은 포스툼(postum)이라는 구수한 영양차인데 미국 몬태너주에서 농사를 짓고있는 [전인수]씨 부인이 보내준 것이었다.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그들이 농장을 시작할 때는 대통령이 그곳에 가서 목수일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 후 1941년 초에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영문저서 <Japan Insied of Out- 한글번역 : 일본군국주의 실상)출판을 위해 경비를 부담했다. 

    대통령은 보내온 그 차를 마실 때면 전씨 내외의 애국심과 그 성실하고 곧은 마음씨를 칭찬하며 그 옛날 몬태너의 넓은 들에서 함께 목수일을 하던 날을 회상하고 즐거워 하였다. 나는 대통령이 여행을 하거나 낚시질을 하러 갈 때면 이 차를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김밥이나 샌드위치와 함께 가지고 따라 나섰다.[전인수]씨 부인은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시절은 물론 타계한 후에도 줄곧 이 차와 함께 노인용 비타민을 나를 위해 보내주었다. 부인의 뒤를 이어 야채농장과 트럭운전까지 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딸과 지금도 서로의 소식을 교환하고 있다. 

      

    대통령이 영광의 자리에 있을때는 누가 참으로 진실되고 의리있는 사람인지 알기가 힘들었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인품이 곧고 바른 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의 고심을 이해 하였고 끝까지 의분심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있다. 공직을 사임 하였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서 집에 가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은 경무대로 달려온 사람들의 만류로, 결국 우리는 차에 오르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화장 앞의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대통령도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감격하여 눈시울이 젖어있었고 나도 목이 메었다. 차에서 내리자 대통령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담옆으로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하고 말했다.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대통령은 한없이 서있고 싶어했지만 나는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무거운 짐을 벗게되어 편해지긴 했지만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무척이나 염려했던 대통령은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공산당은 물론, 사사건건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떠한 곤경에서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할만한 줏대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화장에서도 대통령은 밤중이나 새벽이나 우리 민족의 살 길을 밝혀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토록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노인의 가슴속에 깊이 응어리진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채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한평생 온갖 역경을 도맡아 고난을 이겨내면서 너무도 많은 슬픈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대통령이었기에 노경에 닥친 그 커다란 충격도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이었지만, 곁에서 보기엔 너무나도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이화장의 생활은 경무대의 생활에 비해 시간적으로 좀더 여유가 있어 자유로웠고 경무대의 낡은 다다미방 침실에 비해 온돌방의 아늑함이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것 같았다. 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집을 고치게 되면 그런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고하여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 수리도 지붕이 새는 것을 막는 일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경무대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일본식인 경무대의 방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국가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다다미방인 침실을 우리가 입주한 뒤에도 개조하지 않았으며 목욕탕만은 욕조가 너무 좁아서 욕조 한편을 파내서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었다. 

      

    강석이가 양자로 왔을때도 우리 침실 옆의 방을 내주면서 떨어진 다다미쪽을 대통령이 손수 수리를 했고 감기 들까봐 문풍지만 부지런히 발라주었다. 그리고 이화장의 경우는 콜터 장군이 지낼 마땅한 집이 없다고 하여 빌려준 일이 있어서 온수를 쓸수 있는 등 콜터 장군에 의해 설치 된 몇가지 편리한 시설이 마련되었었다. 그러나 콜터 장군이 수리한 노고도 보람없이 좀 까다로왔던 그의 부인은 겨우 두달을 이화장에서 살고 겨울을 지내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냉동창고라고 혹평을 하면서 다른곳으로 이사해 버렸다.

    아내를 위해 너무나 애를 쓰는 콜터 장군을 가엾게 생각한 대통령은 넌지시 부인 길들이는 법을 장군에게 일러주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콜터 장군이 자기 부인을 위해 해놓은 시설은 내가 이화장 살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전력의 소모가 많은 것이 탈이었다. 다행히 콜터 장군 내외는 온돌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아궁이에 불만 때면 훈훈하고 따뜻한 아랫목의 재미를 대통령은 만끽할 수가 있었다.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지만 때로 불안한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반공포로의 석방으로 자유를 찾게된 청년들은 대통령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여전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틈나는대로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고 이화 장의 창틀과 문짝들도 직접 연장을 가지고 손질하였다. 나도 마음속의 시름을 잊기위해 가끔 현관앞 정원 한 모퉁이에서 은방울꽃을 가꾸며 대통령이 나무를 전지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은방울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손수 심어준 것이었다. 그 꽃은 지금도 해마다 그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 마음을 위안해 주고 있다.

      

    하루는 집안 조카뻘되는 이갑수씨 내외가 이화장으로 대통령을 뵈러 왔을때 돌계단위의 나무를 손질 하면서 [이제는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곧 일본 사람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하면서 대통령은 무척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한 후 그들의 노예근성을 뽑아버리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얼마나 애썼는가를 대통령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통령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주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였으니 두발로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말을 젊은 동포들에게 자주 일러주었다.

      

    우리가 이화장으로 옮겨운 후 더 자주 만날 수 있게된 친척들은 생일이나 명절때만 해왔던 음식들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 왔다. 경무대 시절에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식혜를 내손으로 만들었는데 친척들이 만들어 보내오는 바람에 내가 만들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한번은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정원의 벤치에서 대통령과 함께 냉수를 들며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을때 을생이라는 대통령의 큰누나의 손녀딸이 대통령이 좋아하는 튀각을 해가지고 찾아 왔었다. 을생이는 중년부인이었는데 대통령이 열심히 듣고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더니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그 라디오 저 주세요!]하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라디오는 할머니한테 물어 봐야해]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어떤 것이나 거의 내 의사를 물어보는 법이 없이 주어버리던 대통령이 처음으로 아내인 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고맙기는 했지만 어딘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 라디오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대통령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어 줄 수가 없노라고 거절했었는데 늘 마음에 걸렸다.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이화장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 두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14. 14. 집 없는 나그네

    내용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그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알게될 날이 있을 것이다.

      

    524일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씨로 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단해 드릴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29일 상오 7시 우리는 이화장을 출발했는데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돌아올테니 집을 잘 봐줘]하고 부탁했다. 

      

    김포비행장으로 가는 연도에는 평화스러운 초여름의 농촌 풍격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 가지런히 심어놓은 모를 바라보며 대통령은 풍년을 비는 시를 한 수 읊었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간 동안 기자들이 비행기 안으로 와서 회견을 요청했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기내에서 세관원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하였다. 우리의 짐은 전부 4개였는데 대통령의 옷이 들어있는 트렁크 하나와 내옷과 소지품을 챙겨넣은 트렁크 그리고 마실것과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와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였다. 

    세관원이 보지 않은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내가 이화장 현관을 나오기 전에 응실식 탁자위에서 무심코 집어 넣은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통령이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것을 집어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 하였고 건강도 졸아지는 듯 싶었다. 우리는 조경사업을 하고있는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석에 나가기도 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 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대통령은 옛날 이 교회 중앙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교포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늘 기도를 드렸었다. 


    우리가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최백렬씨 등 우리를 초청해준 인사들과 상의를 하였으나 모두가 아직 좀 더 요양을 하시도록 만류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권고는 당신의 국내사정을 알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 당시 완전히 정치를 떠난 한 고령의 노인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대통령에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별장에서 한없이 신세를 질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 윌버트 최씨와 옛 동지들이 호놀룰루시 매키키가에 우리의 주거를 마련해 주고 생계도 보살펴주게 되었다. 주거가 정해지자 옛 동지들이 쓰던 가구나 전기밥솥과 찌개를 끓일 남비며 김치와 한국음식을 해 먹는데 필요한 그릇 등을 가져다주어 우리 두 식구가 살수있는 간단한 살림살이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옛 친구들의 이와같은 호의와 주선에 감사하였다. 이토록 우리를 보살펴준 사람들중에는 대통령이 경영하던 한인 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통령을 친부모 이상으로 공경하며 사랑으로 받들었다. 우리의 생활은 단조로왔으며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한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황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였다.

    단 두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종일 쉴새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 을 청소 할때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할 집안의 유리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번씩 볼수가 있어서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에 손질을 하며 마음속의 시름을 달래었다. 

      

    대통령은 이때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하도록 배려하였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운동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하여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식사를 들게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세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기도 했다. 326일 대통령의 생신날에는 하와이의 교포들이 탄신축하의 모임을 만들어 대통령을 위로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날로 더하여만 갔고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6대독자인 자기 때문에 남달리 고생만 하시다가 멀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그리시며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를 하면서 대통령은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구한말 구국운동을 할때 쫓기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불효자임을 늘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새로 양자를 맞이할 것을 상의하였다. 누가 한국에 가서 이 어려운 일을 해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우리는 뉴욕에 있는 이순용씨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이씨는 대통령과 독립운동을 했고 한때 내무부장관을 지낸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의 통지를 받자 곧 호놀룰루로 와서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하며 이순용씨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대통령을 위해 양자를 구하러 한국에 왔던 이순용씨는 한때 정부의 오해를 받아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인수를 입양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양녕대군파 종친회의 추천으로 조카뻘이 되는 계대를 맞춰 입양하게된 인수의 사진을 보게된 대통령의 표정은 하와이에 온 후 가장 밝은 것이었다. 대통령은 그날부터 인수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수속상 시간이 걸리게 되자 [그 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할 것이 아닌가]하며 마음을 썼다. 

    이로써 대통령은 생활에 새 활력을 느끼며 나에게 곧잘 농담도 걸어왔다. 종종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젊은이처럼 [그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드디어 19611213일 대통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수가 도착했다. 대통령과 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지 않고 집의 테라스에 나가 인수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어느덧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마당을 들어서는 인수를 바라보자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손을 흔들었다. 인수는 층계를 올라와 우리나라 재래식인 큰절을 하였다. 

    대통령은 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첫 대면이었지만 두사람은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간 같이 다정하였다. 우리는 따라온 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해 주었다.

    대통령은 곧 인수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가지?]하고 물었다. 인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갈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대통령은 [그런가? 나라가 잘 되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야,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게 아니야]하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침통해진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인수에게 뒷뜰이 보이는 마루방에 마련된 환영식탁으로 어서 모시고 나오도록 하였다. 우리가 아들을 맞는 경사에 친지와 제자들이 축하의 인사로 김치는 물론 고비나물까지 한국음식을 골고루 마련해 와서 우리가 매키키가에 살림을 차리게 된 후 조촐하나마 가장 큰 잔치가 벌어졌고 나는 오랫만에 대통령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5. 15. 귀국에의 열망

    내용

    하와이에 와서 보행마저 불편해진 대통령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해 했는데 아들 인수가 와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객지에서 건강이 나빠진 고령의 노인이 아들을 곁에 두게되자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특히 매일 인수가 예의를 갖추어 아침문안을 드릴때마다 몹시 기뻐하였다. 

      

    우리 세식구는 아침 7시반에 일어나고 8시반에 식사를 했는데 식사전에 대통령이 기도를 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쥬스 한컵과 빵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인수와 내가 번갈아 가며 성경과 신문을 읽어드렸는데 대통령은 인수가 읽으면 더 좋아했다. 내가 아침 설겆이를 하는 동안 대통령은 인수의 부축을 받으며 테라스로 나가서 바깥 공기를 쐬었다. 10시반이면 대통령의 운동시간인데 부엌에서 약 10m쯤 떨어진 마루방까지 10회를 왕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다리의 보행력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운동으로 대통령은 인수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었다. 이동안 나는 세탁을 하고 점심식사 준비를 했는데 정오에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은 그날의 식단에 따라 만든 반찬과 밥과 김치였다. 김치는 대통령의 고혈압을 생각해서 아주 작은 부분을 접시에 놔드렸는데 대통령은 늘 인수앞에 놓인 김치그릇에서 더 집어다 들었다. 

    점심 설겆이 할때는 인수도 거들었다. 점심식사 후 약 1시간은 온식구가 낮잠을 잤다. 대통령은 건강이 좋았을 때는 이 오수시간 후에 마당에 나가 꽃에 물도 주고 나무손질도 했었다. 저녁식사는 하오 6시에 했는데 주로 밥을 지었지만 때로는 국수를 들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식성이 좋았기 때문에 반찬이 좋든 나쁘든 우리 식탁위의 그릇들은 설겆이가 필요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졌다. 

    특히 떡국을 끓일때는 부자가 대환영이었으며 인수는 세그릇이나 들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염려할 정도로 떡국을 여러그릇 들었지만 문제없었다. 저녁 설겆이를 마치면 보통 7시가 넘었는데 약 10분정도 성경을 읽고 대통령의 저녁기도가 끝나면 8시에는 모두 침실에 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도 나를 안타깝게 해주는 것은 자나 깨나 귀국할 일념뿐인 대통령이 또 하루를 하와이에서 보낸것을 못견디게 괴로워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나는 인수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통령을 부축하고 인수의 방으로 갔다.

    대통령은 인수에게 우리나라로 가는데 드는 여비가 얼마인가를 묻고 [도대체 내가 언제 우리땅에 가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최백렬씨와 윌버트 최씨가 환국여비를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 했지만 대통령은 [내가 우리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냐?]하며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었다. 

    나도 인수도 울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기어이 소원을 풀어드리겠노라고 설명을 드려 겨우 침실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식탁에서도 인수에게 멀리 우리나라 하늘을 가르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데야]하며 대통령은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 식사는 안드실 생각이세요?]하고 주의를 환기시켜드리면 매우 못마땅한듯이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인수와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때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남북통일을 하려는 이가 있나?]하고 묻기도 하고 [내 소원은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게야]하거나 [그래 일인들은 어떻허구 있누?]하면서 종일토록 걱정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인수에게 [아버님의 병환은 바로 나라걱정과 환국하실 걱정이니 항상 말조심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나의 일과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은 대통령을 뵙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고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생활을 이해하며 도움을 주고있던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답장을 쓰는 일이었다. 이중에는 맥아더 장군, 헤리스 목사. 밴플리트 장군, 화이트 장군 등 많은 미국친지들이 있었고 당시 공무로 하와이에 왔던 렘니찌 장군은 바쁜 일정 중 점심시간마저 할애하면서 대통령을 찾아와 우리를 기쁘게 해 주었다.

    특히 고국에서 김이나 마른 반찬감을 선물로 보내주는 사람들과 봉투에 10달러 5달러씩 넣어 보내주는 미주 동포들의 온정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에 관해 터무니 없는 낭설을 만들어내는 이가 있었고 심지어 이화장에 있던 우리 물건을 몽땅 실어가버린 정치인도 있었지만 김인서 목사님같이 용감한 분들은 그후 [망명노인 리승만박사를 변호함]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인수와 함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가끔 대통령은 가슴에 북받치는 격정을 누를 길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인수는 [걱정마십시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애국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아버님의 뜻은 결코 어버님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애국청년에 의하여 계승됩니다]하고 위로해 드리면 [그래 그렇다. 그까짓 다 지나간 일이야]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상해에 갈때 중국인의 시체를 운반하던 배로 선편을 마련해 준 보스윅씨는 우리를 볼 때마다 내 핸드백에다 대통령의 용돈을 넣어주곤 했는데 그는 대통령의 귀국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동정한 나머지 우리를 전송하고 돌아서면서 자기도 우는 것이었다. 

      

    마음이 환국문제로 가득차있던 대통령은 1961년 성탄절에 교포 김학성씨가 초청해준 만찬회에서 어린이들을 보고 몹시 기뻐하며 [나는 곧 환국한다]라고 자랑삼아 얘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대통령은 자기의 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의 속셈과 강대국들의 뱃심이 한일 관계에 자신이 끼칠 영향을 생각해서 귀국을 못하게 누가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온 천하에 못된 놈들....]하고 대통령이 흥분하기 시작하면 나는 최백렬씨를 불러댔다. 최씨는 대통령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한사람으로 서로는 부자지간 같이 대하였다. 최씨가 오면 대통령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었지만 건강이 나빠질 수록 환국의 뜻은 점점 굳어만 갔다.

    [나를 앞으로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하고 역정을 내면서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떠날테야]하며 신발을 찾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주치의의 [지금 시기가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하다]는 의견과 조국의 땅을 밟아보고 죽겠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1962317일을 귀국일자로 잡았었다. 

      

    최씨의 주선으로 모자와 오버코트가 준비되고 우리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집을 마련해준 윌버트 최씨는 그 집을 팔 예정이었다. 한편 최씨는 우리를 위해 비행기를 예약하고 교포들이 몰려와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대통령은 출발예정인 사흘 전부터 보행난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되었으나 섭섭해하는 교포들에게 환국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우리 모두 서울가서 만나세]하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317일 출발의 날이 밝자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대통령은 외출복을 입고 쇼파에 앉았다. 최백렬씨가 왔으며 우리 영사관에서 전화연락이 있은 후 9시 반에 김세원 총영사가 내방하였다. 대통령 곁에는 최백렬씨와 인수가 앉아있었고 내 앞에는 윌버트 최씨와 김총영사가 자리를 잡았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대통령에게 최백렬씨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이박사님, 우리나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기를 원하고 계신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김세원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나라 위해 한번 더 결심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김총영사가 정부의 귀국만류 권고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대통령은 어느덧 눈이 충혈이 되어갔다.

    이내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 가기를 바라오]하는 것이 대통령의 대답이요 부탁의 전부였다. 그런뒤 휠체어에 몸을 기댄 후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16. 16. 호랑이도 제굴로 돌아간다는데

    내용

    오직 내 나라 땅을 밟아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살고있던 87세의 노인에게 정부의 귀국만류 권고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앞날이 막막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1962년 초 대통령이 트리폴리 육군병원으로부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결과를 통보 받았을때 나는 아들 인수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다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에 주저앉게 된 그 때처럼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암담한 때는 없었다.

      

    먼저 인수는 대통령을 위해 그래도 귀국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를 단독 귀국의 길을 택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 리대통령의 환국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부가 막고 나서는데 그 실현 가능성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우리는 지금도 그 때 리대통령의 환국을 위해 운동을 전개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귀국이 실현되지 못한 채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동정을 표하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중에도 모나라니 요양원의 원장 존슨여사는 대통령을 무료로 입원시켜 간병해줄 것을 제의해 와서 나는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1962322일자의 이 고마운 존슨여사의 편지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요양원에는 우리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던 윌버트 최씨가 그 후원자로 있었고 또한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교포사회에 공헌이 컸던 민찬호 목사가오랫동안 요양했던 곳이기도 했다. 존슨여사는 대통령을 잘 알고 있었고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특히 민찬호 목사의 아드님 토머스 민 박사는 대통령이 별세하기까지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모나라니 요양원을 오르내리며 주치의로서 모든 편의와 도움을 무료로 봉사해 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하야와 동시에 하와이에서 총영사직을 사임했던 오중정씨도 한결같이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1985년 광복 4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외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호놀룰루시 릴리하가에 있는 한인기독교회 마당에 리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 교회는 리대통령이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하였으며 교포사회에서 민족정신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내가 존슨여사에게 고마왔던 일은 모나라니 요양원에서 나에게 간호보조원의 직책을 허락해 준 일이다. 이로써 나는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병원의 부속건물 방에서 나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정부와의 관계는 호놀룰루 영사관에서 두어차례 화분을 보내온 것이 그 전부이었으나 독립운동의 동지이던 교포들과의 관계는 한결같이 다정스러운 것이었다. 최백렬씨와 김학성씨내외 최성대씨.거투르트 리.정순예 김.살로메 한씨 등 기독학원 시절의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회인사들의 위문내왕이 잦았고 대통령은 그들을 만나면 반가워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잠시도 귀국 일념을 버린적이 없었다.

      

    하루는 존슨여사가 여러 병실을 돌아보다가 대통령의 병상이 있는 202호실에 들렸다. 병상에 누워 무엇을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는듯한 대통령의 표정을 본 존슨여사는 [리박사님!]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며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아직도 리박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계셔요?]하고 묻자 [그렇소]하고 대통령은 대답했다.

    이 때 인수가 하와이로 두번째 와서 대통령의 병상을 함께 돌보던 때였다. 늘 대통령의 머리속엔 고향산천의 풍경이 완연한양 한국에서 누가 오면 [지금도 서울 청량리 밖에는 누런 벼이삭이 굽이치고 있는가? 언제 다시 그것을 보고 죽을 수 있을런지]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어릴 때 그곳에서 메뚜기를 잡고 남산에서 연날리기하던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노인의 건망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어서 대통령은 으례 여비가 없어서 귀국을 못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매카키가에서 살 때에 돈을 아끼기 위해 이발도 아니하고 시장에서 사오는 식품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고 나와 인수를 나무랐었다. 대통령은 우리가 돈을 쓰거나 무엇을 사오면 하도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금요일마다 1주일 먹을 식품을 구입해 오던 나는 늘 대통령이 신경을 덜쓰게 하기위해 조심을 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들 인수의 교육문제를 걱정하였는데 [저녀석이 공부를 더해야 할텐데 내곁에서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늘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인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었으나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시킬 궁리만 했다. 인수는 겹치는 가사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늦게나마 공부를 계속하여 뉴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게된데 나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대통령도 천상에서 기뻐하리라 생각한다. 

      

    모나라니 요양원으로 옮긴 후 대통령은 잠은 잘 자는 편이 아니었으나 식사는 여전히 잘했다. 대통령의 병세로 고령의 노인에게서 보는 동맥경화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병상에 누운채 의사표시를 제대로 할만큼 말도하고 의식이 있었지만 무척 힘드는 환자에 속했다.

      

    첫째로 대통령은 워낙 약을 싫어하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약먹일 때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 대통령은 힘이 들면 [아이고, 아이고...]하며 괴로와 할때도 있었고 한때 열이 심할때는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을 했다. 아침에는 사리에 맞는 말을 했지만 흥분한 경우나 오후에는 우리말로만 이야기하는 때가 많았다.

      

    주치의는 두부의 혈액순환관계로 정신상태가 흐리며 노쇠로 하체는 약해졌으나 식성이 좋아서 비교적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병원식사를 싫어했지만 늘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다. 나는 대통령을 일으키거나 눕힐 때는 [하나, , !]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대통령은 넌지시 나를 바라보며 힘을 덜어 주려고 애썼다. 나도 때로 고달프고 괴로울 때는 대통령과 함께 먼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이나 나의 서투른 도라지 타령을 부르면서 위안할 때도 있었다.

      

    병원음식에 질려버린 대통령을 위해 그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열거하며 노래를 지어부르면 따라서 함께 부른 적도 있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그 얼마나 오랜 세월 해외에서 대통령이 고향음식의 맛과 고향산천을 그리며 지내온 나날이었던가.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에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을 때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 죽을 것을 각오한 바이지만 단 한가지 조국의 산천과 겨례의 품안에서 죽게되면 오죽이나 행복할까 하고 늘 생각하였었다.

      

    19644월 말에는 대통령의 별세 후를 생각하여 그 준비차 인수가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56월 말에는 인수를 다시 급하게 불러야만 했다. 대통령의 병세가 위독하기 때문이었다. 인수는 나와 함께 매일 대통령의 병상을 정성껏 돌보았다. 

    그러나 718일 밤 나와 인수는 대통령의 병상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우리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숨결이 거칠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대통령이 이미 고통의 경지는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의 숨소리가 멎자 간호원은 임종임을 알려주었다.  

    때는 하와이 시간 719135분 이었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에서 별빛이 초롱초롱하게 비치는 밤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으로 힘들고 슬플 때도 많았지만 대통령을 간호하며 함께 지낸 날들이 지금은 행복하게 생각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 

    병상에서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굴을 찾아간다는데]하고 말하면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던 대통령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다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있겠네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불렀던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속에 맺힌 한이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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