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속의 외교관 -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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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한국인, 프란체스카 영부인(1900~1992)
“가끔 지사관저 뒷마당 빨래줄에 때국물이 덜 빠진 남방셔츠가 널려있어도 물이 귀해 손 봐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깁거나 올이 다 낡아 구멍 나기 직전의 빨래들이었다. 너무나 딱한 건 팬츠였다. 헤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노블’참사관이 갖다 준 침대시트를 침모와 함께 밤새껏 말려 팬츠를 여러 장 만들었다. 이 팬츠를 조 지사 부인에게 주어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 영부인의 6.25 비망록, 1950년 8월 8일 일기 중 -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이 박사의 첫 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에 앞자리에 앉았다.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bon appetit!)’하고 우리에게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 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3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도중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다. 날계란 하나로, 때로는 사과 한 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25살의 나이 차,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을 극복한 결혼이었다. 이승만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결혼식 반지를 포함한 모든 결혼 비용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부담했다.
그녀는 절약 정신이 투철하고 의지가 강하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독어, 영어, 불어와 속기 및 타자에 능숙했던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박사의 비서로, 독립운동 동지로 그리고 아내의 일인 삼역을 훌륭히 감당했다.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평소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올이 터진 스타킹을 신고 몽당연필을 깎아서 사용한 일화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녀는 하야 후 하와이 체류기간에는 남편의 병상을 지킨 여느 한국 여인처럼 헌신적인 아내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엔 대한민국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외교 업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6.25전쟁 기간에는 3개국 언어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사를 알려 국제 사회의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냈으며, 외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로 전쟁 중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6.25의 낙동강 전선에서 사투가 이어지던 어느 날, 이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대구 방어선이 뚫리면 내가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며 당분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가 있으라고 명령했다. 여사는 순종적인 아내였으나 그 명령엔 불복하고 대통령 곁을 끝까지 지킨다.
이승만 박사의 별세 후, 5년 간 오스트리아에 머물다 영구 귀국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틀니를 하기 위해 3천 달러를 가지고 왔다.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는 며느리 조혜자씨의 물음에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 천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묻는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고 관 뚜껑에는 남편의 친필휘호인 ‘남북통일’을 덮으라고 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한 것이 아니니깐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이 박사 말년의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을 모함했던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몸소 실천했던 그녀는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용서하라! 잊어버리라! Forgive! and Forget!”라고 말했다.
아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글이다.
《戀書 - 프란체스카 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 중에 한 명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 있다면 그 중에 한 명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내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애당초는 시가 아니라 편지로 쓰여진 글을 시 형식으로 새롭게 번역한 내용이다. 위의 글에서 보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절절히 잘 나타나 있다. 현실적으로 사람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증폭되고 있음을 본다. 이건 참 묘한 감동이요 흥분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마지막 남은 한 사람마저 지상에서 사라질 때 그 사랑은 최고조로 확대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아이러니이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남겨진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이승만 박사가 망명지 하와이에서 돌아간 뒤 홀로 귀국하여 서울 낙선재(樂善齋: 창덕궁 안의 건물)에 머물러 살 때였다고 한다. 평소 관광객이 오면 여사는 기거하던 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 한분이 가까이 오더니 입고 있던 치마를 들쳐 올리고 그 안에서 돈주머니를 뒤적여 돈을 꺼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한다. 할머니는 그 돈을 여사에게 주면서 “옛날에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으니 이걸로 사탕이라도 사서 드시라”고 하더란다. 여사는 그 돈을 받아들고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고맙다, 고맙다 했으며 그 돈을 오래 동안 몸에 지니면서 쓰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돈’이라고 말했다.
댓글목록
김영시님의 댓글
김영시 작성일kk님의 댓글의 댓글
kk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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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우리나라 역사가들과 지식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너무 모른다ㅡㅡ
ㅡ1984년 소설 `단`의 실제주인공이며 일명 우학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던분입니다...
어릴때부터 단전호흡을 배웠으며 천문 지리 의학에 도통하셨음. (1900~1994년 작고)
봉우 권태훈 선생의`봉우일기`중에서 발췌
ㅡㅡㅡㅡㅡㅡㅡㅡ
신문지상으로도 보도되고 잡지에도 발표한 바 있었다.
전인지술(前人之述:앞사람의 서술)이 비의(備矣:갖추어짐)라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 못할 것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외람(猥濫)한 줄 알면서도 이 붓을 든 것이다. 평(評)에 오른 인물은 신문지상대로 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전임 부통령 이성재시영(李省齋始榮) 선생과 현 부통령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씨와
현 국회의장 이철기범석(李鐵騎範奭) 군과 역시 전임 국무총리인 장면(張勉) 씨와
현 대통령 출마자인 신흥우(申興雨) 등을 조상(俎上:도마 위)에 놓고 내 의견대로 평을 해보자.
제일 먼저 붓을 현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에게로 옮기자.
그의 초년 생활이나 임정(臨政) 당시 경력은 인소공지(人所共知:남이 다 아는 바)니 그만두기로 하고,
8.15 후 귀국하여 우리 안전(眼前)에 표현(表顯)된 일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4년 임기 안에 한 일을 사실대로 평해 보자.
무엇보다도 이박사는 친소인원현인(親小人遠賢人: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함)하는 근성이 있다.
이 근성은 무슨 연고인가 하면 박사는 박학(博學)하나 정(精)하고 전문적이 아니다.
그저 여러 가지를 알 정도요, 한 가지라도 확신있게 아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와 접근되는 인물들이 자기의 의사를 승순(承順:순순히 승복함)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데,
소위 거물급들이야 누가 제 의사에 맞지 않는 이론이나 주장에 무조건하고 승순할 리가 없고 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시정하려는 것이 보통일이다.
여기서 자기 주장대로 하자면 물론 순조(順調)로 안 되고 자기 위신 문제도 있다.
자기 생각에도 자기가 무던하거니 하는데 거물급과 상대하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물급을 경이원지(敬而遠之:겉으로 존경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멀리함)하고 절대로 접근을 피하며 자기 의사에 승순하는 인물을 사용해서
자기 말이라면 유령시종(維令是從:오직 명령만 옳다고 따름)하는 자들만 상대하는 아주 보통에 지나는 성벽(性癖)이 있다.
문선홀략(聞善忽略:남의 잘한 것은 금시 잊음)하고 기과불망(記過不忘:남의 과오는 잊지 않음)하며
청참이미(聽讒而美:남의 잘못을 고함을 듣고 좋아함)하고 문간이구(聞諫而仇:자기의 잘못을 지적함을 듣고는 미워함)하는 성질의 소유자다.
그래도 자기의 박학(博學)으로 이명시하(以明示下:아래에 현명하게 보임)하나
대통령 4년 간에 정적(政蹟:정치업적)이 곡상무직하(曲上無直下:위로는 굽었고 아래는 곧음이 없음)라는 평외(評外)에는 불평할 것이 없다.
승순(承順)하고 아부하는 인물들이 박사의 조정(朝廷)에는 가득하고,
정직하고 공정한 인물들은 화(禍)를 피하기에 여가가 없어서 각 방면으로 은신들을 한다.
말하자면 현자(賢者)는 선피(先避:먼저 피함)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6.25사변도 있고 정계혼란도 있고 별별 사건이 다 있는 것이다.
박사에게 아부하던 자들이 4년 임기가 되자 별별 수단을 다 사용하여 박사 재선운동에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거물급들이나 혹 대상인물들은 무슨 화(禍)나 있지 않을까 해서 슬슬 피하는 중이다.
내가 무자년(1948)에 서울서 초대 대통령 선임 호외(號外)를 보고 내 소감을 기록한 바 있었다.
박사가 정치에서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선정(善政)을 못할 것이니 우리 백성은 도탄(塗炭)에 들 것이라고 하였고,
또 우리 백성이 운이 좋아서 이런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무슨 연고인가 하면
미온적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나오면 현상유지나 혹은 완진적(緩進的:완만하게 나아가는) 보조로 민족도 반세기 내지
일세기를 경과하지 않으면 완전한 활로를 찾기 어려운 일인데
의외로 박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민족은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도탄에 들어서 민족적으로 각성(覺醒)이
새로워서 불구(不久)하여 우리민족의 상처를 대수술할 날이 있으리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 과연이다.
4년간 민생고(民生苦)야 다른 인물이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100년간 받을 고난을 단시일에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박사 정치는 대외, 대내 다 실패다. 차기에 또 당선된다면 불구하여 정변(政變)이 있으리라고 확언해 둔다. (이 부분은 5,16혁명의 예언적 암시로 사료됨//본인생각)
성문과정(聲聞過情:소리 소문이 그 실정보다 과도함)한 인물이다.
금번에 만기(滿期) 퇴임하고 이종여년(以終餘年:여생을 마침)하면 박사에게는
행막행언(幸莫幸焉:이 이상 행복할 수 없음)일 것이다.
만약 재임한다면 천추(千秋)에 유취(遺臭:나쁜 냄새를 남김)할 것이다.
현상(現狀)으로도 시번화(時繁華:시절의 번화함)는 있었으나 만세처량(萬世凄凉)은 막면(莫免:면치 못함)할 것이다.
단기 4285년(1952) 6월23일 봉우서우유신정사(鳳宇書于有莘精舍)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