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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속의 외교관 -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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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한국인, 프란체스카 영부인



가끔 지사관저 뒷마당 빨래줄에 때국물이 덜 빠진 남방셔츠가 널려있어도 물이 귀해 손 봐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깁거나 올이 다 낡아 구멍 나기 직전의 빨래들이었다. 너무나 딱한 건 팬츠였다. 헤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노블참사관이 갖다 준 침대시트를 침모와 함께 밤새껏 말려 팬츠를 여러 장 만들었다. 이 팬츠를 조 지사 부인에게 주어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 영부인의 6.25 비망록, 1950년 8월 8일 일기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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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3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도중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날계란 하나로, 때로는 사과 한 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이승만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결혼식 반지를 포함한 모든 결혼 비용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부담했다. 그녀는 절약 정신이 투철하고 의지가 강하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독어, 영어, 불어와 속기 및 타자에 능숙했던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박사의 비서로, 독립운동 동지로 그리고 아내의 일인 삼역을 훌륭히 감당했다. 하야 후 하와이 체류기간에는 남편의 병상을 지킨 여느 한국 여인처럼 헌신적인 아내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엔 대한민국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외교 업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6.25전쟁 기간에는 3개국 언어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사를 알려 국제 사회의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냈으며, 외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로 전쟁 중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6.25의 낙동강 전선에서 사투가 이어지던 어느 날, 이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대구 방어선이 뚫리면 내가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며 당분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가 있으라고 명령했다. 여사는 순종적인 아내였으나 그 명령엔 불복하고 대통령 곁을 끝까지 지킨다.



이승만 박사의 별세 후, 5년 간 오스트리아에 머물다 영구 귀국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틀니를 하기 위해 3천 달러를 가지고 왔다.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는 며느리 조혜자씨의 물음에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 천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묻는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고 관 뚜껑에는 남편의 친필휘호인 남북통일’을 덮으라고 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한 것이 아니니깐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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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말년의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을 모함했던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몸소 실천했던 그녀는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용서하라! 잊어버리라! Forgive! and Forget!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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