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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북진통일 주장” 美 국무부 기밀문건 발견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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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밀해제된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딜런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의 1959년 면담 기록/photo 나탈리아 마트베예바 



건국 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이 4·19혁명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인 1959년 10월까지 북진통일론을 미국 측에 설파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강한 경계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미 국무부 기밀문건이 발견됐다.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55주년를 앞두고 공개된 이번 문서는, 1959년 10월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1909~2003)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고 이틀 뒤인 10월 25일 미국 국무부 앞으로 타전한 기밀문서다.
   
문서 상·하단에 ‘기밀(Confidential)’이라고 적힌 문건에 따르면, 당시 대화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후일 미 재무장관까지 지낸 딜런 당시 국무부 부장관은 “나는 10월 23일 리 대통령(이승만)을 예방했다. 비록 그의 말이 머뭇거리며 끊어졌고, 이름과 장소 등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좋은 상태였다”면서 “그(이승만)는 대화 대부분을 통일 문제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딜런 부장관은 이어서 이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한국인들은 통일의 더딘 진전에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강조했다”며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다”고 기록했다.
   
   
“통일 달성할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
   
딜런 부장관의 예방을 받은 이 대통령은 대화 내내 그의 ‘북진통일론’을 설파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딜런 부장관은 “이 같은 상황에서 다른 현안 문제를 이승만과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다룰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까지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이란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로, 반공포로 석방(1953년 6월), 정전협정 서명거부(1953년 7월 27일) 등을 주도하면서 신생국가 건립과 번영의 초석이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10월 1일)’을 미국으로부터 이끌어낸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에 대한 신념이 4·19혁명(1960년 4월)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까지 굳건히 유지됐고, 이 같은 이승만의 대북, 대공산권 강경정책을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줄곧 우려했음을 재확인해주는 문서라는 평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한국 대통령 최초로 미국을 국빈방문해 상하원 합동연설을 가졌을 당시, 유창한 영어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한 경고와 함께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유약한 대응을 질타해 33차례 박수를 받았다. 이로 인해 ‘용감한 자유의 투사’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는 ‘골칫거리’ 같은 존재였다.
   
이승만 대통령 서거 55주년을 앞두고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과 관련한 여러 건의 미 국무부 기밀문건을 주간조선에 제공한 나탈리아 마트베예바씨(영국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박사과정·북한경제사 전공)는 “러일전쟁, 1차대전, 중일전쟁 시대에 살았고 6·25전쟁까지 직접 경험한 이승만이 여전히 북진통일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은 대단히 신기하다”고 말했다.
마트베예바씨는 앞서 딜런 국무부 부장관이 1959년 7월 31일, 주한 미대사관 앞으로 긴급타전한 조봉암 진보당 당수의 구명(救命) 지시 전문을 주간조선에 제공한 바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2·3대 대선에서 맞붙었던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과 대척점에 섰던 정적(政敵)이었다.
   
딜런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의 1959년 방한은 같은해 7월 단행된 조봉암 처형과 이듬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국빈방한 등 대한(對韓) 정책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딜런의 방한이 이뤄진 다음 해인 1960년 6월, 역대 미국 대통령 최초로 한국을 국빈방문한다. 아이젠하워는 6·25전쟁 와중인 1952년 12월 방한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는 대통령이 아닌 당선자 신분이었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미 국무부 문건 가운데는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을 미국이 적잖이 우려했음을 뒷받침하는 문서도 있다. 각각 1955년과 1959년 생산된 문서로 이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 발언이 정보 보고 형태로 미 국무부에 보내진 문건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1955년 5월 한국군 6군단을 찾은 자리에서 “몇몇 먼 나라는 우리가 북진하면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것이라고 우려한다”며 “몇몇 동맹국은 우리가 북진하는 것을 꺼린다”고 발언했다. 또한 이 대통령은 “우리는 무작정 한가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고, 북으로 진격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말도 남긴다.
이 대통령은 이어서 “미국이 아무리 열심히 전쟁을 피하려고 해도, 이는 영원히 가능할 수 없다”며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하는 시기가 조만간 올 것”이라고 정전(停戰)협정으로 끝난 6·25전쟁의 재개를 예상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국내 반전(反戰) 여론 속에서 충돌을 꺼려온 미국을 다분히 겨냥한 발언으로, 주한 미대사관은 이 대통령이 일선 군부대 방문 때 남긴 이 같은 호전적 발언을 수집해 본국에 타전한 것이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레이시(LACY)’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충돌로 역대 최단명(1955년 5~10월)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윌리엄 레이시다. 1959년 6월 작성된 미 국무부 문건 역시 ‘리(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요구’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경계의 시각을 담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자신에 대해 가진 이런 우려를 충분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에 나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중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공산권 정책을 인정하는 언급도 나온다. 딜런 부장관은 “이 같은 목표(통일)에 대한 그의 강력한 개인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살인(killing)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이 수단이 돼야 한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관점을 평가했다”고도 적었다.

   
美, 이승만 ‘북진 명령’ 시 제거 계획
   
딜런 부장관은 “그(이승만)와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접근법을 준수하고 따를 의향이 있다”는 이 대통령의 말도 함께 기록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딜런 부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북진통일의 신념을 미국 측에 전달함과 동시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방침에도 협조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 행정부의 이승만 제거 예비계획인 일명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지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 따르면, 에버레디 작전은 이 대통령이 ‘북진 명령’ 등 돌출행동을 할 경우 이승만을 제거한다는 계획으로, 이 대통령 서거 10년 뒤인 1975년 뉴욕타임스 보도로 세간에 알려졌다.
   
문건에서 딜런 부장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인들이 통일문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우리(미국) 입장에 대한 이해와 동의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는 의례적인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나탈리아 마트베예바씨는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미국에 의존하고 있으니 적대감까지는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4·19혁명이 발발해 이승만이 하야했을 때 미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 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617100006&ctcd=C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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