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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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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히 택하야 동양에 처음

예수교나라를 만들어가지고 아시아주에 예수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기심이라”

- 이승만의 ‘한국교회 핍박’ - 



 

김명구 /연세대 신학박사, 전 서울장신대 교수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기독교관이 바뀌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더 이상 배재학당에서 자각했던 근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기독교 복음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했고 동시에 근대 기독교적 윤리관에 의해 변화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기독교관은 윌슨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줬고 후일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그의 기독교관은 김구와 달랐고 특별히 강력한 반공주의를 선택한 이유가 된다.

이승만이 접촉한 기독교

윤치호가 민영환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게 되자 1886년 5월 21일부터 윤치호의 뒤를 이어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특별 강의를 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만국지리, 역사, 의회제도와 민주주의, 서구 문화와 세계 정세에 대해 강의했다.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 오후 회의 진행방법과 절차, 토론과 연설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
특별히 이승만은 관심 있게 서재필의 강의를 들었다. 이를 통해 평등한 참여, 자유롭고 합리적인 토론, 민주적 합의, 진정성의 개념을 습득했다. 이후 이승만의 주도 아래 11월 30일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가 만들어졌다. 협성회를 통해 ‘질서 정연한 학생의 모습, 회의규칙의 엄격한 적용, 성실하게 토론에 임하는 자세, 전 회원의 열정적인 참여,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용감한 태도’가 길러졌다.
이승만이 만민공동회의 만여 명 앞에서 가두연설을 하고 시국 토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협성회 교육 덕분이었다. 민주주의가 한국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과 가치의 근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을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도덕성과 사회정의의 표출이 자신들의 역할이라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배재학당은 복음의 이름으로 창설된 미션스쿨이었지만 학문의 전당이라는 특성이 보다 강조되었다. 기독교의 교육은 ‘인간평등의 인간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한다. 한계를 설정하되, 사회를 존중하는 성서적, 공화적 전통을 강조한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리가 있지만 타인의 권리를 위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각 사람에게 권리를 주신 야훼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전통과 관습, 제도 등도 절대시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기독교 교육의 결실은 일제가 내세웠던 황도정신(皇道精神)을 거부하는 규범이 되었다. 기독교의 교육과 그 이데올로기가 독립과 저항 에너지가 된 것이다.

이승만과 한성감옥의 입교자들

1902년 친러내각은 독립협회의 관계자들과 일본 육사 출신들, 친일적 인물이라고 판단되던 반대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유길준 등과 공모해 역모를 꾸민다는 명목이었다.
유길준의 동생이자 내부협판이었던 유성준, 법부협판과 승지였던 이원긍, 경무관 김정식, 참서관 홍재기, 강화 진위대 장교 유동근과 홍정섭, 후일 제국신문 사장이 되는 이종일, 만민공동회 간부 양의종, 안경수의 양자 안국선, 이상재와 그의 아들인 부여군수 이승인, 조택현, 장호익, 권호선, 김교선 등 무관학교 교관들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런데 감옥에는 이승만, 신흥우, 성낙준 등 배재 출신들이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한 대역죄로 수감되어 있었다. 친러내각은 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감옥 환경이 열악한 데다 1903년 3월부터 시작된 콜레라에 40명 이상의 죄수가 죽어나갔다. 하루 동안 열일곱 명이 눈앞에서 쓰러져 수인들은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울분을 토로하며 보복을 다짐했다. 그러나 조기 석방 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자 낙담과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서 이승만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과 사랑, 성령의 임재가 역경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며 이렇게 피력했다. 그의 고백처럼,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선교사들의 더 할 나위없는 도움을 받았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1898년 11월 보부상들과 격투가 있었을 때 맞아죽지 않았던 것, 1899년 1월 탈옥을 시도했을 때, 소지했던 권총을 사용하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곤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the unseen hand)이 자신을 구출”했다는 고백이 이승만의 근저로부터 나왔다.(이승만 영문자서선) 기독교는 근대 이데올로기로만 이해했던 과거의 것이 아니었고, 기독교 선교사들은 더 이상 제국주의의 주구(走狗)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의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고 이상재, 이원긍, 김상옥, 이희준을 비롯해 40여 명 이상의 수인(囚人)을 기독교에 입교시키는 역할을 했다. 1895년 2월 육영공원이 폐교됨에 따라 조선 정부에서 이 학교 학생을 배재학당에 위탁했을 때 이승만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에 입학했다. 아펜젤러와 서재필 등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와 연결이 되었다.
정치 개혁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만민공동회의의 주도자로 참여했고, 그런 이유로 24세의 나이로 중추원 의관(議官)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젊은 이승만은 박영효 중심의 혁신내각 제안에 동의했고, ‘중추원이 박영효의 송환 통과’ 제안을 이끌자 역모자로 구분되었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1899년 1월 경무청 감방에 투옥됐다.
이승만은 대역 죄인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탈옥하면서 같이 도망을 치던 최정식이 권총 세 발을 발사해 간수 김윤길을 부상시켰기 때문에 죄가 가중되어 있었다. 황제폐위 음모 가담 혐의, 무기소지, 탈옥미수죄를 범했기 때문에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목에 10kg 무게의 칼을 쓰고 손과 발은 수감과 족쇄로 묶여야 했다. 사형집행을 기다려야 했을 때, 그를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이 선교사들이었다.

배재학교 스승인 아펜젤러와 벙커 부부를 비롯해 헐버트가 찾아왔고 애비슨, 언더우드, 게일, 존스 등도 국사범이었던 인물들을 찾았다. 선교사들은 콜레라가 돌 때, 약품을 넣어 줬고, 많은 물품을 차입하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옥중의 처우 개선에 큰 역할을 했고 이들의 석방을 위해 연명으로 진정서를 내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특별히 아펜젤러는 이승만 가족의 생계까지 돌봐줬다.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에서 이승만은 태(笞) 1백과 종신형으로 형량이 낮춰졌다. 고종 황제가 알렌과 선교사들의 간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미국정부의 요청을 거부하면서까지 이승만을 보호하고 나섰고, 고종 황제도 선교사들의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면하지 않았다.
기독교인 이승만은 동료 수인(囚人)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여기에 선교사들의 적극적 간여, 새로 부임하게 된 감옥서장 김영선과 간수부장 이중진 등의 배려로 성경반이 개설되었다. 1902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옥중학교’가 개설되었다. 옥중학교 교사로 양의종과 신흥우가 참여했다. 감옥은 (성경)연구의 방으로 시작해서 기도의 집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예배당으로 바뀌었다가, 결국 신학당이 되었다.
감옥 안의 성경반이 신학당이 되는 과정에서, 이상재, 유성준, 이원긍, 김린,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등의 입교자들이 나왔다. 이능화의 지적처럼 양반 관료와 개화 지식인들의 기독교 입교가 시작된 것이다. 묘했던 것은 이상재, 유성준, 김정식 등 적지 않은 개화 지식인들도 내적 회심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한성감옥 입교자들이 회심 체험을 했다는 것은 더 이상 이들이 기독교를 근대문명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더 이상 근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근대 체제의 방편도 아니었다. 근저로부터 솟아나는, 내적 신앙에 대한 고백이었다. 한편, 이 사건은 선교사들이 전한 신학이 다른 방향으로 분화되고 확장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복음의 사명이 개인구령과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민족 혹은 한국의 구원문제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승만에게 기독교 문명은 한국이 구원을 얻기 위해 지향해야 할 목표였다. 기독교 복음의 역할과 가치를 국가 구원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회심의 과정을 거쳤던 이수정이나 윤치호에게서 나타났던 신앙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개인의 내적 회심이 한국을 구원시켜야 한다는 사명 의식으로 연결되었고, 동시에 교회의 역할도 ‘국가 존망’과 직결되었다. 한국은 기독교 문명국가로 영국과 미국과 같은 자유와 평등의 자주독립국가가 되어야 했다.
개인구령의 문제와 교회 활동, 그리고 한국의 장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904년 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이승만은 석방되었다. 그리고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이 써준 추천서 19통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선교사들의 추천서에는 옥중에서 거둔 전도의 성과와 이승만이 장차 한국의 복음 전파를 주도할 인물임이 강조되었다.

이승만과 영적대각성운동

석방된 이상재, 유성준 등 개화 관료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연동교회나 안동교회, YMCA 등에서 활동했다. 개인의 구원과 민족구원의 문제를 동일하게 여겼던 이들에 의해 기호계 기독교민족주의가 발흥되었다. 이승만의 국가구원관이 이들 기독교민족주의자들에게 연결된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신부적(神賦的) 국가관과 연결되었으며, 광복 후의 기독교 건국론과 연결되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00년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시베리아, 북만주를 차지한 러시아와 대치시키자면 일본이 한국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을 선택했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우리는 도저히 일본에 반대하여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먹 한방도 날릴 수 없었다” 며 냉소했던 것이다.
고종 황제는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미수호조약 당시의 원조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그리스도 신문, 1902년 2. 27, 3. 13, 4. 17)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외교 관리는 필요가 없다며 알렌을 파면시켰고, 을사늑약이 체계된 후에는 곧 바로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더 이상 한국이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다. 19세기 한 국가가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에 의해 문명국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국가의지(state will)의 존재, 곧 적대적인 세계에 대해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은 비문명국가인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탈했고, 국제사회는 일본의 한국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을 바라보는 눈은 모두 긍정적이지 않았다. 기독교를 국권회복과 근대 이데올로기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을사늑약으로 모든 외교 공관이 서울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기독교만이 서구와 한국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런데 교회가 민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외면한다는 질책이었다.
실제로 1907년 이후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비정치화로 돌아선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1907년의 사건에는 거대한 역설이 있다.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이 한국을 버리고 떠난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해 일본과 대립하게 했던 것이다. 미국 교회를 자극했고 미국 정부의 대한(對韓) 정책을 수정하게 했다.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일본 우선의 정책도 바꿨다. 비정치를 추구했던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이 한국 독립에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신문과 잡지는 한국교회의 성과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The Outlook, 1912.12.14. 참조) 한국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서구 기독교 세계로 알리게 되어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서구 기독교 사회로 전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 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일본은 가혹한 정치와 자신들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이를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과 미국 교회와 연결시킬 줄 알았고 미국 정계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판단처럼 미국 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 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당수의 미국 교회 목사와 교회 지도자는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 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했다. 그것이 미국 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승만과 공산주의

상해임시정부가 정상 궤도에 이르지 못하자 각 계보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특히 만성적인 재정 궁핍의 문제에 시달리자 각 그룹의 대립과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이승만의 기독교와 친미성향에 대한 신채호나 박은식을 비롯한 국수적 민족주의자들의 불신과 불만, 기독교 민족주의 내부의 서북파와 기호(畿湖)파와의 갈등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에게 확연히 나타났던 것은 강력한 반공사상이었다. 이승만은 친소 독립전쟁 노선을 견지했던 이동휘를 강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묘했던 것은, 적어도 1913년까지만 하더라도 이승만은 이동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함남 단천 출신이었던 이동휘가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1905년 3월 강화도진위대장직을 사임한 뒤였다.
1902년 참령(參領)으로 강화부 진위대장에 부임했던 그는 특별히 강화 감리교회 전도자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로 왕래하며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 김정식, 전덕기 등과도 교제를 나눴다. 그러나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 전도사였던 이동휘는 독립을 내세우며 공산주의자로 전향했다. 독립을 앞세우며 무신론의 길의 걷게 된 것이다.
그는 한인사회당의 이름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고 6812명이나 되는 당원들을 모았다. 선교사들의 기대를 받던 기독교 전도사 이동휘가 레닌의 촉망과 기대를 흠뻑 받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가구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가 한국을 훼손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전술한 대로 이승만은 한국이라는 한 나라를 인격화했다. 한성감옥에서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을 동시에 요청했다. 개인과 국가를 동일한 위치에서 봤고 그 구별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구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이 공산이데올로기라는 유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출처]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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